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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r 05. 2020

2020 독서노트 4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 : 중용의 번역고 철학적 해석

중국적 세계는 연속성, 생성, 전이하는 현상적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궁극적 개별자는 없다. 사물은 객관적 대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이 객관성이란 개념이 없다면 단지 사물이 유동과 흐름으로 융해되는, 변화하는 조건과 환경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물은 대상이 아니라 변화하는 과정과 사건의 연속적 장(field) 안의 초점(focus)이다. 비대상화, 비사실화된 담론이 과정의 언어이며 그 언로로 말하고 듣는 것은 곧 사물의 흐름을 체험하는 것이다.

과정적 언어는 대상이 언어적 표현의 피지시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명과 묘사의 지시적 언어는 그 의미들이 변화하는 의미의 장에서 서로를 은유하고 존중하는 존중의 언어로 대체된다.(24쪽)     

                                     



때로 아주 우연의 일치처럼 딱 들어맞는 독서의 기회가 주어진다. 로저 에임스와 데이비드 홀이 공저한 《일상사에 초첨 맞추기-중용의 번역과 철학적 해석》(2019,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를 읽은 것이 딱 그런 사례다. 난 마침 <21세기에 대학중용 다시 읽기>라는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권우 선생은 모 매체에 이 책을 소개했고,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개인적 친분을 이용하여 하루만 빌려달라고 간청했었다. 주문해서 읽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런데 이권우 선생은 흔쾌히 주소를 물어보더니 속달로 내게 이 책을 보내주셨다. 물론 나는 하루 만에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지만,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다 읽고난 핵심만 말하자면, 이 책을 안 읽었더라면 나는 꽤나 불충분한 강의를 진행했을 것이다. 중용에 대하여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 책만큼 나를 계발시킨 책은 보기 드물었다. 이 책의 미덕은, 이전의 서양의 중국학자들이 서양의 철학적 개념에 입각해서 중국철학책을 번역했다면, 이 책의 저자들은 당대 중국인의 세계관과 사상사의 맥락에서 새롭게 번역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용’이라는 책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Doctrine of the Mean’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냄새가 나는 번역이 대세였다면, 저자들은 ‘Focusing the Familiar(일상에 초점 맞추기)’로 새롭게 번역했다. 실체적이고 이성적이면서 합리성을 중시하는 서양철학적 번역이 아니라, 관계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면서 일상적인 변화의 장 속에서 적절한 행위를 실행하는 제목짓기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당장 이 책과 원서를 동시에 구매신청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 읽은 책을 구매하고픈 욕망이 드는 드문 책이었다. 아울러 정밀한 학문적 태도를 보여준 로저 에임스와 데이비드 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덕분에 한뼘은 성장한 기분이다. 학문의 세계는 이리도 깊고 넓고 높고 크고 방대하며 세밀한 것이다. 아, 얼마나 읽어야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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