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을 찾지 마라. 현상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교훈이다.> 문호 괴테의 말이다. <가상(假象)의 세계는 유일한 세계다. 진실된 세계란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이다. <세상의 신비는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속에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야말로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수잔 손탁의 말이다. <신념이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한다.> 데이비슨의 말이다.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데리다의 말이다. (절판본, 160쪽)
이번에 나온 김영민의 《인간의 글쓰기 혹은 글쓰기 너머의 인간》 (글항아리, 2020)은 엄밀히 말해 신간이 아니다. 688쪽에 32,000원의 액수를 달고 나온 이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두 책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1996년)과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 글쓰기(와) 철학》(1998년)의 합본호다. 두 책이 품절됨에 따라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이렇게라도 합본호로 나온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김영민의 글쓰기에 대한 완결본(?)을 얻은 셈이다. (사실 나에게는 품절된 두 권의 책이 모두 있다. 나는 김영민의 팬이기 때문이다.)
김영민은 오래전부터 우리 지식인 사회의 식민지성을 비판하고, 탈식민성의 글쓰기를 천착해왔다. 그는 진리(眞理)도 무리(無理)도 아닌 일리(一理)를 추구하며 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해왔다. 그는 학문적 글쓰기를 하되, 대학교수적 문법을 버리고, 새로운 글쓰기의 형식을 실험해왔다. 그의 글이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어색한 것은, 그러한 실험적인 글쓰기를 하는 지식인이 우리 사회에 거의 없다는 증거이다. 그런 점에서 김영민의 글쓰기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꾸 읽다 보면 글의 매력에 빠져, 그의 글들을 찬찬히 뜯어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글이 밀도가 높으니, 찬찬히 읽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잡된 글쓰기>라고 한다. “컨텍스트를 이해하는 텍스트, 일상을 이해하는 원전, 잡문을 이해하는 논문, 저잣거리를 이해하는 왕실, 뿌리의 흙에 기생하는 수많은 진균과 곰팡이를 이해하는 열매, 그리고 삶을 이해하는 <잡된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배타적 진리나 본질이 아니라 독자적 진실을 잡으려는 육성의 노력이 글쓰기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의 글쓰기는 전방위적으로 기존 학문의 고정된 틀을 벗어나려 한다. 그의 말에 탈(脫) 자가 많이 쓰이는 이유도 그중 하나이다. 글쓰기의 있어서 탈논문중심주의, 논문쓰기에 있어서 탈원전중심주의, 배움에 있어 탈인식중심주의, 가정사에 있어서 탈가부장주의, 탈가족이기주의, 종교에 있어 탈신앙(구원)지상주의, 경제에 있어 탈개발(업적)지상주의, 이념에 있어 탈냉전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의 사상체계가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안팎을 넘나들겠다는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말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김영민 보유국’이다. 그의 글쓰기가 아직은 많은 사람에게 읽히지 않지만, 나는 그의 학문적 실험이 계속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가 있어 우리 학계가 덜 오염되고, 더 실험적이고, 식민지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쓰는 책을 어느 것 하나라도 읽고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다른 저서들을 찾아 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단, 이 책은 글쓰기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 아니고, 글쓰기의 철학(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책임을 말해야겠다. 글쓰기 테크닉을 기르는 책은 아니니까 그것을 기대하고 구입하면 읽기 힘들 것이다. 제대로 알고 구입했다면 지성인의 글쓰기가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되는지는 쪽 쪽마다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추신> 학계에 널리 알려진 김영민이 또 한 명 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서울대 경치외교학부 교수 이름도 김영민이다. 동명이인이니 착각하지 마시실. 두 분 모두 훌륭한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는 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