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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May 21. 2020

2020 독서노트 :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김환석 외 21인,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성과감성, 2020)

21세기 사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양한 인간 및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21세기 세계에서 기후 변화생태 위기과학 기술의 획기적 변화 등 하이브리드적 현상들이 점점 확대 및 심화되고 있다면인간 중심적 이원론에 기초한 20세기 사상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결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한 행위자로 보면서 그들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결합을 이해하려는 21세기 사상의 탈인간 중심적 일원론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훨씬 더 필요하고 적절하다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은 바로 이런 모험적 시도를 보여 주는 새로운 이론들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들어가며, 17)     


1.

드디어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책이 나왔다. 이감문해력연구소에서 기획하고, <문화일보>에 2019년 9월부터 2020년 3월까지 연재된 21세기 사상에 대한 소개가 합쳐져 단행본으로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이성과감성, 2020)이 나온 것이다. 2011년에 작고한 프리드리히 키플러를 제외하고 모두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철학자들 25명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면서 21세기 철학의 지형을 소개하는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와 진정한 동시대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철학이라면 동서양철학을 두루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이 책에 나오는 21세기 철학자들의 이름을 보았을 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도나 해러웨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름조차 생경한 철학자였다. 역사공부할 때 조선시대에서 끝내고, 근현대사를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학창시절의 내가 떠올라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 책을 가이드북 삼아 큰 그림을 그려놓고, 읽어야 할 책들을 한 권 두 권 섭렵하며 모자란 빈칸을 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철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다양한 철학을 전개 해나가지만, 억지로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다면 인간 중심적 이원론을 넘어 탈인간 중심적 일원론(또는 다원론)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탈인간의 자리에 매체, 자연, 식물, 동물, 미생물,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온갖 물질들(심지어는 타자기)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모험은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 정치 경제이론, 생태 이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지대를 확장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 자리의 겸손함을 확인함과 동시에 인식의 지평을 고도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말이다.      


2.

25명이 이야기를 모두 소개하자면 다시 한 권의 책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한 명만을 맛보기로 소개할까 한다. 제인 베넷이다. 이 철학자를 소개하게 된 동기는 내가 고양시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2019년 3월 28일 고양시장 이재준은 일산 호수공원 장미원 잔디광장에서  <고양 나무 권리선언문>을 낭송했다. 이 선언은 더 이상 나무가 목재나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같은 한 생명으로서의 존엄성과 미래의 동반자임을 확인하는 선언이었다.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생명의 소중함을 담은 나무 권리선언으로 공공 수목관리에 대한 기본 이념을 바로 세우고 사람과 나무가 공존하는 고양시를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제1조> 나무는 한 생명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제2조> 나무는 오랫동안 살아온 곳에 머무를 주거권이 있습니다.

<제3조> 나무는 고유한 특성과 성장 방식을 존중받아야 합니다.

<제4조> 숲은 나무가 모여 만든 가장 고귀한 공동체이며 생명의 모태입니다.

<제5조> 나무는 인위적인 위협이나 과도한 착취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제6조> 사람과 나무는 벗이 되어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제7조> 나무의 권리는 제도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지자체 역사에 기리 남을 이러한 선언은 평소에 생태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고양시장의 남다른 행보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제인 베넷이라면 이러한 고양시의 태도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제인 베넷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고? 생태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  )은 생기론적 입장에서 생태와 인간과 정치를 새롭게 조망하면서 철학적, 정치적 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치고 있다. 2010년에 발표한 《생기론적 물질》은 환경과 신유물론에 관한 생각을 잘 정리한 대표적 저술이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안 됐다. 이 책이 어서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다. 전문가들의 건투를 빈다.)

그는 묻는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독립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생명이 서로 관련지어 있고, 서로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인간에게만 주어진 권리를 다른 생명체에게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생태파괴가 곧 인간파괴로 이어지는 현대에 이러한 물음은 한가한 철학자들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실존적 질문이라 볼 수 있다.  

제인 베넷은 “자연, 윤리, 정동에 초점을 둔 연구를 통해 자연과 물질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활발하게 반응하는 적극적, 능동적 주체라는 점에 주목한다.”(142)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간 이어져 온 인간/사물, 사회/자연, 주체/객체라는 이른바 ‘대분할(Graet Divide)’의 벽을 허물려한다.”(143) 인간의 정치적 특권을 상정하는 정치철학만으로는 변화된 세계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물질의 능동적 역할을 외면하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물질도 정치적 경로를 바꿀 수 있다. 존재의 행위성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에 의한 네트워크 안에서 비로소 발휘된다. 인간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작은 벌레 하나도 인간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끼친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선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기론적 접근은 이제 모든 존재를 정치적 주체로 호명한다. 군중은 더 이상 인간의 집합체가 아니라, ‘인간-자연-사물의 집합체’이다. “공적 삶이란 매 순간 인간과 사물의 다양한 결합 방식에 따라 다르게 생성되어 효과를 일으킨다.”(145) “정치 생태학은 바로 인간과 사물이 결합된 집합체가 만드는 정치적 행동이다.”(145) 민주주의의 주체 역시 그에 따라 확장된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과 물질이 동등한 정치적, 법적 권리를 갖는 것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접근법임과 동시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될 수 있다.       


<추신> 기회가 된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핵심개념과 주요개념만이라도 정리해 다시 한번 글을 쓰고 싶다. 언제 그런 기회가 오려나? 강의로 풀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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