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나면 한 세계가 허물어지는 재난 시대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바뀌지 않는 한 재난의 일상화는 예고된 일처럼 보인다. 돌이켜 보면 사회의 불의와 참상이 극에 달할 때 인간은 글을 쓰며 존엄을 지켰고 최고의 작품을 낳았다. 평범한 내 인생도 그랬다. 내 삶은 글에 빚졌다. 예고 없는 고통의 시간대를 글을 붙들고 통과했다. 크게 욕망할 것 없고 가진 것 없어도 글쓰기 덕에 내가 나로 사는 데 부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학인은 지독히도 삶에 휘둘렸던 자기 체험을 글로 정리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에 품위를 부여해 주는 일이네요.” 그 말이 뭉클했다. 조지 오웰이 바랐던 “보통 사람들의 생래적 창조성과 품위가 발현되는 세상”을 글쓰기는 돕는다고 믿고 싶어졌다.(18쪽)
은유가 쓴 《글쓰기의 최전선》은 이미 독서노트에 올렸다. 이번에는 《쓰기의 말들》(유유, 2016)을 읽었다. 요즘은 아무래도 읽고, 쓰기에 대한 독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주된 관심사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읽고, 쓴다는 일은 일반인들에게는 쉬운 행위가 아니다. 나는 직업이 독서인(讀書人)이자 작가(作家)이니,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치고, 일반인들에게 읽고 쓰는 행위를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언어행위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로 세분화된다. 그중에서 듣고 말하는 1차적 언어행위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읽고 쓰는 2차적 언어행위는 아무래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읽고 쓰는 일은 주로 당대의 지배계급들의 전유물이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읽고 쓰는 일 자체가 특권과 같은 것이었고, 민중들은 언감생심 시도조차 어려운 행위였다. 시대는 변하여, 한문을 읽고 한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조선시대도 아니고, 한글로 읽고 한글로 표현하는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읽고 쓰는 행위는 진입장벽이 높다.
학교 교육 역시 듣고, 읽기와 같은 수동적 언어 행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말하고 쓰기와 같은 능동적 언어행위는 소외되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민중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일찌감치 포기하기 십상이다. 학교에서조차 가르치고 있지 않은데, 먹고살기 바쁜 성인이 되어서 읽고 쓰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읽기와 쓰기 중에서 더욱 고도한 언어행위는 물론 쓰기이다. 쓰기야말로 언어행위의 최정점이자, 언어민주주의가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의 꽃은 활짝 핀다.
쓰다 보니 거창해졌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민주주의는 일단 논외로 하고, 자신의 삶과 생각을 여실히 가꾸는 행위 중 쓰기만 한 것이 없다. 쓰기는 힘겨운 자신의 삶을 위무하기도 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희미한 불빛이 되어 앞 길을 비추기도 한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슬픔도 쓰기를 통해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물론 쓰기를 업으로 삼아 작가가 되는 사람도 개중에는 있지만, 굳이 작가를 꿈꾸지 않는다 해도, 쓰기는 가장 멋진 자기 정리와 표현의 방식이다.
그러면 얼마나 써야 할까? 김훈 같은 작가도 ‘필일오(必日五)’라 하여 ‘하루에 반드시 원고지 5매’는 쓰자고 다짐했다. 원고지 5매면 A4용지로 3분의 2 정도다. 지금 내가 쓴 분량 정도에 해당한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분량이다. 문제는 그놈의 마음이 안 먹힌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게다가 쓸 생각이 없는데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쓰고자 한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쓰지 않는 데에는 그보다 더욱 많은 핑곗거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이다. 저자도 쓴다는 일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쓰기를 종용하는 데에는, 그래서 쓰기와 관련된 문구를 찾아 친절하게 왼편에 배치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오른편에 친절하게 추가한 것을 보면, 쓰기가 참으로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리라. TV광고 말마따나 ‘참으로 좋은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기적을 바라며,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이런 책 한 권을 낸 것이리라. 감동과 가독성이 높은 이 책을 읽어보면서 글쓰기를 다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글쓰기는 삶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고, 삶이 주인공이 사는 세상이 민주주의 세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