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맛 8 : 장자의 우정

신맛 7 - 논쟁의 맞상대가 죽었다

by 김경윤

논쟁의 맞상대가 죽었다


장자가 어떤 사람의 장례식을 치르고 오다가 혜자의 묘 앞을 지나게 되자 따르는 자를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초나라의 도읍인 영에 흙을 바르는 장인이 있었다. 그는 자기 코끝에 백토를 파리의 날개만큼 얇게 바르고 석공인 장석에게 이것을 깎아 내게 했다. 장석은 도끼를 바람소리가 나게 휘둘렀으나 영의 장인은 그저 듣기만 하고 그대로 있었다. 백토는 모두 깎여 떨어졌지만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영의 장인도 선 채로 얼굴빛조차 바꾸지 않았다. 송나라의 원군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장석을 불러 말했다. ‘시험삼아 내게도 백토를 바르고 깍아내어보아라.’ 장석이 말했다.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술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죽고 없어서 불가능합니다.’ 나는 혜자가 죽은 뒤로 나의 이론의 전개할 바탕이 없어졌다. 나도 이제 혜자가 죽었으니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졌구나.”

- <서무귀> 7

장자와 혜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했다. 지혜와 우정! 장자의 우정을 생각하면 딱 한 사람이 떠오른다. 혜시(惠施. 기원전 370년경~기원전 310년경)이다. 혜시는 장자의 또 다른 자아(alter-ego)이자 경쟁자(counter parter)였다. 혜시는 공손룡과 더불어 전국시대의 논리학인 명가(名家)의 사상가로 유명했다. 양나라 혜왕의 시대에 재상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니, 장자와는 달리 관재수가 있었던 셈. 당시는 합종연횡의 혼란기였는데, 혜시는 약소국끼리 연합하여 강대국인 진나라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合從)을 주장했고, 장의는 강대국인 진나라와 연합해야 한다는 연횡(連橫)을 주장했는데, 혜시가 소수의견으로 몰려 양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는 초나라에 갔다가 고향인 송나라로 돌아왔는데, 그때 장자와 만나 깊은 사귐이 있었던 듯 하다.

한 명은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웅변가였고, 다른 한 명은 정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독설가였다. 그럼에도 둘은 설전을 주고받으면서도 우정을 잃지 않았다. 《장자》에는 혜시와 장자의 대화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나중에 대표적인 대화를 살펴볼 것이다.) 《장자》 마지막 편인 <천하>에 혜시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데, 일부분을 인용한다,


“하늘과 땅의 도로부터 혜시의 능력을 본다면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모기나 한 마리의 등에가 수고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가 물건에 집착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가 도의 일단(一端)을 충당할 수 있다 해도 괜찮겠는데, 그 변론이 도보다 귀하다고 하니 위태로운 일이다. 혜시는 이것으로써 스스로를 편안케 하지 못하고 만물에 대하여 관심을 분산시켜 만족할 줄 모르면서도, 마침내는 변론을 잘한다는 것으로서 명성을 얻은 것이다.

아깝다! 혜시는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방탕하게 행동하여 참된 도를 터득치 못하였고, 만물을 뒤쫓음으로서 자기 본성으로 되돌아갈 줄을 모르고 있다. 이것은 울림이 나오는 곳을 찾으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자기 몸과 그림자를 경주시키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물론 이 평가는 장자 본인의 평가라기보다는 장자의 후학이 장자의 입을 빌어 한 평가일 것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말 잘하는 것에서는 명성을 얻었지만, 참된 도를 터득하지는 못하고 평생 지치도록 떠들었던 사람”이 혜시였다. 친구에 대한 평가치고는 야박하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다르다. 장자는 혜시의 무덤을 보며 제자에게 절절한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혜자가 없는 세상은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더 보태랴. 장자는 혜시가 죽은 후 20년을 넘게 살았다. 그의 말년은 참으로 쓸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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