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시든 자식은 명령에 따를 뿐이지요. 그런데 음양과 사람 간의 관계는 부자지간을 넘는 것입니다. 음양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하는데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거칠고 모진 것이지 음양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천지가 나에게 몸을 주어 태어나고, 삶을 주어 수고롭게 일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이제 죽음을 주니 나를 쉬게 해주려나 봅니다. 그러니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들려고 하는데, 쇳물이 튀어나와 ‘저는 기필코 막야와 같은 명검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대장장이는 쇳물을 불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 한번 사람의 몸을 타고 태어났다고 ‘다음에도 사람으로! 사람으로!’라고 외친다면 조물주는 나를 불길한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천지는 커다란 용광로요, 조물주는 대장장이라 한다면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된 들 좋지 않겠습니까? 편안히 잠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날 뿐이지요.[成然寐, 蘧然覺]”
- <대종사> 10
이번에는 자리와 자래 차례이다. 전편의 자사는 병이 걸려서 신체가 변했다면, 이번에 자래는 죽을 병에 걸려 곧 죽을 지경이다. 자래의 가족이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병문안 온 자리는 이러한 슬픔을 물리치고, 아예 방으로도 들어가지 않고 방문에 기대서서 이렇게 말한다.
“어이 친구, 곧 죽게 생겼네. 죽으면 어디 가서 무엇으로 태어나려나? 쥐의 간(鼠肝)이 되려나? 벌레의 팔뚝(虫臂)이 되려나?”
이 정도면 병문안이 아니라 거의 조롱에 가깝다. 우리 사회에서 절친이 죽어가는 자리에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 정신나간 놈으로 취급당해 멱살이 잡혀 끌려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곧 죽게될 자래는 이 철학적(?) 조롱에 웃으며 답한다.
“그러게 친구, 죽은 후에 어디로 가서 뭐가 될지는 나도 모르지. 천지라는 용광로에 녹여져서 조물주가 나를 뭘로 만들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명검이 되게 해달라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고집하는 게 오히려 불길한 것이지. 조물주가 만드신 거라면 뭐라도 좋은 것 아닐까? 나는 그저 편안히 잠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날 걸세.”
죽었다가 다시 무엇으로든 태어나는 것을 장자는 자래의 입을 빌어 “편안히 잠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나는 것[成然寐, 蘧然覺]”이라고 말한다. 장자의 생사관을 이보다 잘 표현한 문장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문구를 적어 액자로 만들어 놓고, 가끔씩 쳐다보면 다짐한다. 우주적 시간에 비추어보면 우리네 인생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깜빡 잠들었다가 문뜩 깨어날 거라고. 죽음은 삶과 삶 사이를 잇는 가교일 뿐이라고. 하느님이 알아서 용도에 맞춰 잘 해주실거라고. 내가 걱정하고 욕망할 것이 아니라고.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클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죽은 이후의 세계를 더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현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비통한 자들과는 달리 초연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