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회야! 이리와 보거라. 너는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데 어찌하여 벼슬을 하려 하지 않는 것이냐?”
안회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벼슬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는 성곽 밖에 밭이 조금 있는데 죽은 충분히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성곽 안에도 작은 밭이 있어 거기서 무명과 삼을 얻어 옷을 짓기에 충분합니다.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놀 수 있고, 선생님에게 배워 스스로 즐겨 살기에 충분합니다. 저는 벼슬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공자가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습니다.
“좋구나, 너의 생각이! 나도 이런 말을 들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이익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스스로 얻을 줄 아는 사람은 이익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음을 닦은 사람은 지위가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나도 이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너를 보면서 그 참모습을 보는구나. 이것이 나의 소득이로구나.”
- <양왕> 10
《장자》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노자보다 공자가 더 많이 나온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장자가 노자 계열의 학자가 아니라, 공자 계열의,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안회 계열의 학자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자가 평가하는 안회는 공자의 경지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대종사> 15를 보면 안회가 좌망(坐忘)의 경지에 도달하자 공자는 “나도 너의 뒤를 따르며 배움을 얻어야겠다.(丘也請從而後也)”고 고백하기도 한다.)
어쨌든 안회와 장자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는 점, 청빈한 삶에 머물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공유한다. 장자가 안회를 애정 어린 시선을 바라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장자나 안회나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됨에도 벼슬을 얻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다는 점에서 보면, 그들의 가난은 ‘자발적인 가난’에 가까운 것이리라. 과거에는 선비의 가난함은 ‘청빈(淸貧)’이라 하여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든지 독립적 삶을 구성할 수 있는 조건이 됨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난’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많을수록 좋다’는 무한 부의 축적이 자본주의 사회의 권장윤리이다. 문제는 그 ‘많을수록’이 한도가 없기에 브레이크가 없다는 점이다. 엑셀레이더만 있고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분명 불량품일 것이다. 어디 불량품이기만 하랴. 자신도 죽이고 남도 해치는 살인무기임에 분명하다.
요즘 들어 깊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브레이크’다. 멈춤이 없는 전진, 성찰이 없는 개발, 아낌이 없는 소비가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이 위험사회에 살다보니 언제 멈춰야 할지 까먹고 지낸 것 아닐까? 본문에서 안회는 공자에게 ‘원하지 않습니다[不願]’와 ‘충분합니다[足]’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넘치는 삶과 불필요한 삶에 제동을 거는 힘이 바로 이 두 문장이다. 그리고 이 두 문장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문장이기도 하다.
<추가> 《백경(Moby Dick)》의 작가로 유명한 허먼 멜빌은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당시 미국 금융경제의 중심가인 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게 좋겠다(prefer not to do)’는 독특한 어구를 반복적으로 말하는 바틀비를 등장시켜 자본주의 욕망의 극단적 대립 인물을 창조한 적이 있다. 이 바틀비라는 인물은 자신의 삶의 만족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거부하는 것만을 삶의 태도로 삼았기에 안회와 직결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나름 자본주의적 노동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만하다. 한 번 읽어보시길.
이상으로 장자의 구수한 맛이 끝났다. 거의 매일 쓰다시피해서 전체 본문의 반을 썼으니 가파른 고개를 넘어 정상에 선 기분이다. 이제 천천히 조심조심 내려가는 마음으로 쓰고 싶다. 다음은 <장자의 쓴맛 - 정치풍자편>으로 이어진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쓰겠으니 기다려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