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교사는 아니지만 작가로 초대되어 학교에 강의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 특강 시간에는 강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기도 하는데, 아이들 중 일부분은 아예 처음부터 강당의자에 앉자마자 잠에 빠져듭니다. 지도교사들이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깨우지만 몇몇 아이들은 막무가내입니다. 그토록 잠에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교사연수랍시고 대형강의실로 들어가면 아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교사와 아이들은 참으로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내 강의탓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정말 미안합니다. 강의를 줄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맹인이 길을 인도할 수 없듯이, 잠든 교사가 잠든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오락을 하면서 조는 아이들을 본 적은 없습니다. 회식을 하면서 조는 선생도 못 봤습니다. 키보드를 두르리는 아이, 술잔을 채우는 선생은 생기발랄합니다. 살아있습니다. 비약(飛躍)하자면, 교육은 죽었고, 오락과 회식은 살아있습니다.
무안에 있는 식영정의 현판글씨. '연비어약'이라는 글자가 강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비약(飛躍)이라는 말의 어원은 《시경》의 <대아> ‘한록’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솔개가 하늘 높이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헤엄친다(鳶飛戾天 魚躍于淵).”에서 왔습니다. 사자성어로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삶을 즐기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왜 솔개와 물고기는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삶을 즐길까요? 갇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솔개를 새장에 가두고, 물고기를 어항에 가두었다면 이들은 늘 벽에 부딪히고 좁디좁은 공간에서 조바심을 내다가 결국은 죽고말지도 모릅니다. 《장자》에 나오는 바닷가의 새처럼 아무리 좋은 곳에 가두고 산해진미를 먹인다고 해도 결국 새가 죽고 만 까닭은 “새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새를 키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새를 키웠기 때문입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학생들도, 선생님도 본래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학교가 그들을 가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학교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살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깊은 잠에 빠졌던 겁니다. 자, 그렇다면 자연스런 결론에 도달하는군요. 학생과 선생이 원하는 방식으로 학교를 바꾸어야겠습니까? 학교가 원하는 방식으로 학생과 선생을 바꾸어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