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독서는 호흡이다. 나는 이미 읽고 쓰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경고한 그 세계다. 나는 물을 벗어난 물고기들처럼 몇몇 용감한 선조들이 2,400년 전에 그 땅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어류가 되기보다 서툴게 걸으며 공기를 직접 들어마시는 양서류가 되기를 택했다. 언젠가 우리는 보다 우아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상상한다.
나는 길고 복잡한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다. 나는 그 세상에서 육신을 벗고 언어의 일부가 되고 싶다. 같은 꿈을 꾸는 나의 동족들, 읽고 쓰는 종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예 지면을 딛고 선 볼품사나운 다리를 잘라내고 날아오르고 싶다. 그럴 수 없어 서글프다.(309~310쪽)
‘읽고 쓰는 인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장강명의 《책, 이게 뭐라고》(아르테, 2020)을 읽었다. 젊은 소설가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존재인 장강명은 온갖 문학상을 휩쓸며 고수익을 올린 행운아에 속한다. 그런 그도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었나보다. 방송국 출연, 온갖 강의, 팟캐스트의 사회자로 살면서 부수입(?)을 올려야 살 수 있었나보다. 그는 인세보다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하는 다양한 매체활동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책만 보고 책만 쓰는 삶을 간절히 바란다. 팟캐스트 책소개 프로그램을 요조와 함께 진행하며 경험하고 들었던 생각을 이번 책에 녹였다.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고, 안정적 수입을 올리는 활동이기도 하고, 책을 소개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던 책소개 프로그램의 이름이 <책, 이게 뭐라고>이다.
팟캐스트나 유뷰브에 들어가면 장강명과 요조가 진행하는 <책, 이게 뭐라고>를 시청할 수 있다. 화제가 되는 신간을 작가나 번역가와 함께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재미지다. 이 책은 그 프로그램의 후기(또는 잡감)을 기록한 것이다. 아울러 프리랜서 소설가 장강명의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책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을 때 그렇다.
“지금은 말하는 일과 쓰는 일에서 오는 수입이 달리는 자전거의 양쪽 페달 같다. 두 페달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밟아야 프리랜서 글쟁이라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달린다. 회사 다닐 때보다 분명 더 자유롭고 벌이도 썩 낫지만 한쪽 페달에서 발을 떼는 것은 여전히 두렵다. ‘말하는 일도 재미있고 매력 있잖아? 너도 그럭저럭하잖아?’ 하고 자문하기도 한다. 회계의 문제가 아니라 각오의 문제이며, 바로 내가 이 상황을 선택하고 승인했음도 안다.” (222쪽)
소설 쓰기 외의 말하기(방송과 강연)에서 얻는 수입을 승인하면서도, 이러한 상태를 못내 불안해하는 장강명을 읽을 때, 쓰기만으로는 수입이 도대체 보장이 안 되는 나같은 작가는 장강명이 부러운데, 그는 거기서 벗어나고파 안달이다. 심지어 읽고 쓰는 삶이 훼손되는 것 같은 느낌이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불안감은 거의 모든 작가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문자매체에 대한 실효성은 음성과 영상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사양화되어가고 있다.
나는 장강명의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괜찮은가? 장강명은 지금부터 내가 걸으려는 길을 이미 걷고 그것을 회의하며 다시 글쓰기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말하는 길을 포기하고 쓰는 길로 가는 그의 용기에 우선 박수를 보내자. 책읽기와 글쓰기의 생태계에서 그가 살아남기를 빌어보자. 심지어는 불필요한 신체를 버리고 ‘언어의 일부가’가 되고 싶다는 그의 욕망을 인정하자.
그리고 생각해보자. 나는 말하는 사람인가? 글쓰는 사람인가? 아내의 평가에 따르면, 나는 말하기가 더 승(勝)한 사람이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 말하기로 벌어들인 수입이 글쓰기로 벌어들인 수입에 몇 십 배에 해당한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나는 말하기의 수입이 거의 단절된 상태이다. 이를 어쩔 것인가? 대답보다 고민이 많아지는 책을 읽었다.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