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묻고 내가 답하는 인문학 Q&A
인간이 홀로 된다는 것을 고독(孤獨)이라고도 하고 외로움이라고도 합니다. 고독(孤獨)을 풀이하면 쓸쓸하고 외로운 거니까. 뭐 같은 말이라고 해도 상관없겠네요. 제가 한때 좋아하던 노래 중에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시에 가락을 붙여 노래한 양희은의 노래가 있습니다. 시는 이렇습니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https://youtu.be/hSlkK3Cw3VU)
어떠세요. 마음이 짠해지시죠. 아래에 노래를 첨부해릴 테니 한 번 들어보세요. 이 노래에서는 모든 존재의 외로움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존재의 디폴트값이 외로움이니 그로 인해 슬퍼하거나 울지말고 외로움을 견디라고 말하네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외로움(loneliness)와 고독(solitude)을 다른 상태로 이해하고, 외로움은 수동적으로 홀로된 상태를, 고독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독립한 상태라 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외로움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고, 고독은 추구해야할 것이 되지요. 전자에게는 연결이 필요하고, 후자에게는 단절이 필요합니다. 전자는 결핍이고 후자는 충만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자에게는 보살핌이 필요하고, 선방(禪房)의 스님에게는 독각(獨覺)이 필요하다고나 할까요?
한편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고독과 버림받음을 구별합니다. 니체는 ’고독‘을 “존재의 말과 그 말을 담아 두고 있는 상자 모두가 나를 향해 활짝 열리는 복된 고요함”과 같은 상태라 말하고, 이에 비해 ’버림받음‘은 자신이 아무리 떠들어도 자신의 말을 주변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찬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말을 이해해서 찬사를 던지는 것이 아닌 상태라 말합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나 할까요. 함께 지내는데 홀로 있는 것만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요? 이런 경우라면 수백 명이 겉에 있더라도 진짜 외롭겠네요.
이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외로움은 어떤 것에 해당하는지 생각해보라는 말이겠지요. 코로나 사태는 환경으로 주어진 고립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태도가 나오겠지요. 어떤 사람은 이 고립의 상태를 자기발견의 기회로 삼아 더욱 고요히 침잠하기도 하고요. 그동안 생각 없이 관계했던 많은 것들을 정리하는 기회로 삼기도 하지요. 또 어떤 사람은 외로운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넷플릭스를 깔고, 스마트폰의 대화창을 열어놓고, 유튜브를 서핑하면서, 상품방송을 쇼핑하면서 고독의 시간을 회피하고 합니다. 그나마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이 있는 사람이지요. 최악은 아무런 관심과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가는 극빈층도 많다는 점입니다.
외로움 자체(loneliness itself)가 아니라 나의 외로움이 어떤 외로움(which loneliness)이냐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에 따라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식은 달리 처방되어야 하겠지요.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하시다면, 저는 이번 코로나로 인한 외로움을 자기발견과 충전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못 읽었던 책도 좀 읽으시고, 안전한 곳에서 가벼운 운동도 하시고, 소중한 관계를 돈독히 하시고, 주변의 소외된 사람도 돌보면서 생산적인 방식으로 외로움을 극복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코로나 사태를 자본주의적, 소비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은 뭔가 모순되어 보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