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6. 진보를 믿습니까?

그대가 묻고 내가 답하는 인문학 Q&A

by 김경윤

젊은 시절, 역사를 발전하며, 인간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도 그러한 역사발전과 진보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유는 시간의 직선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녹색평론>(175호)에 실려 있는 정희진의 글을 읽으며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직선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과학적 진술도 아니고, 인간의 상상력이 믿음의 영역으로 굳어지면서 생겨난 새로운 현상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직선적 시간관은 인간의 역사에서 오래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사피엔스의 역사는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원환적으로 순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상상력은 1년을 주기로 농사를 지었던 사피엔스의 문화적 특성의 산물이었지요. 지구의 공전과 자전, 달의 기울기와 차기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낮과 밤, 4계절의 변화, 그의 반영인 음양오행 역시 순환적 시간관의 반영한 사유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 가장 어울리는 시간관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직선적 시간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고전적으로 삶과 죽음, 나라의 흥망성쇠의 리듬이 이러한 시간관을 상상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직선적 시간관이 가장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제국주의의 형성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제국주의적 삶의 기준으로 하여 야만과 문명, 식민지와 제국, 미개한 나라와 문명한 나라, 후진국과 선진국, 더 세분화하면 후진국, 개발도상국, 중진국, 선진국으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진술에서 나왔을 원시공산주의,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시간 구분도 이러한 직선적 시간관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진보와 보수의 개념은 이러한 직선적 시간의 흐름에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나눠지기도 합니다.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한때 가장 행복하다는 나라로 꼽혔던 방글라데시와 헬조선이라 평가되기도 하는 대한민국 중 어디가 진보된 나라인가요? 최첨단의 자본주의를 자랑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국 중 어느 나라가 선진국일까요? 주저하지 않고 대한민국과 미국을 꼽는 사람은 과연 진보를 선택한 것일까요? 기준은 무엇인가요? 좀 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삶인가요?


이제 살다 보니 직선적인 시간관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흐른다는 변화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것이 직선일지, 곡선일지, 원운동일지, 진자운동일지, 아니면 한 방향으로 수렴될지,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다양하게 발산할지 알 수 없습니다. 미시물리학의 세계에서는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도 결정되지 않았고, 관찰자의 개입에 따라 분산되던 운동이 일정한 패턴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사회를 분석해봐도, 시간의 방향을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한없이 퇴보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정체되기도 하고, 훌쩍 앞서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터넷의 보급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전되고 있지만, 학생의 인권이나 여성의 권리, 소수자에 대한 인식, 종교운동의 퇴행성은 창피할 정도입니다. 과거의 기준으로 진보된 사회라고 말할 수도차 없어 보입니다. 도식적 시간관이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요?


시계.jpg

생각이 더욱 복잡해집니다만, 중간정리하는 마음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더이상 진보를 믿지 않습니다. 이제는 종말도 천국도 믿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나이브한 시간관도 이제는 버립니다. 자본주의가 망하면 사회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신화도 믿지 않고,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의 마지막 시스템이라는 후쿠야마의 주장도 믿지 않습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유리조각을 치우고, 돌덩어리를 거두며, 어두운 길을 걸을 때는 조심하고, 힘든 일을 만나면 함께 또는 홀로 해결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며, 내 삶도 그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않고 능력껏 실천할 뿐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1세기 신중년의 자기계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