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 맛 3 - 장석과 사당나무
장석이 제나라로 가다가 곡원에 이르러 사당에 심어진 참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뒤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굽어볼 정도였습니다. 열 길 높이에서야 비로소 굵은 가지가 뻗기 시작했는데, 배를 만들 만한 가지들도 십여 개나 되었습니다. 구경꾼들이 장이 선 것처럼 모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걸어갔습니다. 그의 제자는 그 나무를 실컷 구경하고 장석에게 달려가 물었습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스승님을 따라 다닌 후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했습니다.
“그만해라. 쓸모없는 나무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쉽게 깨져 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슬고 말 것이다. 그것은 재목이 못될 나무이다. 쓸 만한 곳이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있는 것이다.”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를 무엇과 비교하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돌배, 배, 귤, 유자 등 과일이 열리는 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따는 과정에서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어지고 작은 가지는 휘어진다. 이들은 자기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을 괴롭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목숨대로 끝까지 살지 못하고 중간에 일찍 죽어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세상살이에서 희생되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고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쓸모 없는 나무가 되기를 오래 전부터 바라왔다. 여러 번 죽을 뻔하다가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쓸모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가 있었겠는가? 또한 그대와 나는 모두가 한낱 보잘것 없는 존재이거늘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도 죽어가는 쓸모없는 인간인데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안다는 말인가?”
<인간세> 12
이번에 등장한 것은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다. 쓸모없어 오래 산 나무 이야기 세 개가 연달아 나오는데, 그중에 첫 번째 나무 이야기다. 제나라 곡원에 사당나무다.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뒤엎을 만하고, 둘레가 백 아름 정도고, 높이가 산을 굽어볼 정도면 적어도 천 년은 묵은 나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이 나무는 그토록 오래 살 수 있었을까?
사람에게 쓸모 없었기 때문이다. 과실을 맺는 나무였다면 벌써 꺾여버렸을 것이다. 곧게 자란 나무였다면 벌써 배나 집을 짓는 재목(材木)으로 잘려나갔을 것이다. 재주가 많고 재능이 있는 존재의 운명이 그러하듯, 고달프고 지쳐 결국 소진되고 만다. 그것을 깨달은 이 나무는 쓸모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몇 자례 넘기고 이제야 간절히 바라는 쓸모없음에 도달한 것이다. 천수(天壽)를 누리는 천수(天樹)가 된 것이다.
목수 장석과 제자의 시선은 재목만을 바라본다. 재목으로 찍히면 꺾이고 잘린다. 목수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겠으나, 그것이 나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 제명대로 못 살고 비명횡사하는 나무는 자신이 제목감임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장모님은 기도 중에 우리 아이들에게 나라의 동량(棟梁)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기둥과 대들보가 되려면 먼저 잘려야 한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동량 따위는 되지 말라고. 제명대로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살을 파고 뼈를 깎는 일 따위는 할 필요 없다고.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다. 피로는 지나치게 쓸모있게 보이려는 헛된 욕망 때문이다. 인간의 간을 살리려고 곰을 잡을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 우루사 선전을 떠올리고 있다.) 한 해에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가 평균 잡아 2,400명이다. 사람을 죽이는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는 결코 재정신이 아니다. 노동자의 목숨을 담보삼아 성장하는 기업은 악마의 맷돌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사당나무는 수천 마리의 소가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고, 수천 마리의 새가 깃들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다. 그 웅장한 나무를 바라보면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할 수도 있고, 그 주변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도 있다. 존재는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다른 증명 따위는 필요 없다. 인간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쓸모를 기준으로 만물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이미 낙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