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 맛 4 - 하백과 북해약의 대화
가을 홍수로 모든 강물이 황하로 흘러들었습니다. 그 본줄기는 얼마나 큰지 양편 강기슭 모래톱에 소나 말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황하의 신 하백(河伯)은 기뻐하면서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을 자신이 갖췄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하는 동쪽으로 흘러가 북해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았으나 물의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하의 신은 비로소 얼굴을 돌리어 북해의 신 북해약(北海若)을 우러러보고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속담에 백 가지 도리를 알고는 자기만 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저를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 일찍이 공자의 지식도 적다는 둥, 백의의 절개도 가볍다는 둥 말을 듣었지만 지금까지는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선생님의 끝을 알 수 없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런 것 같이 느껴집니다. 제가 선생님의 문하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위대한 도를 터득한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북해약이 말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하여 말해줄 수 없습니다.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대하여 말해줄 수 없습니다. 여름이라는 시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견문이 좁은 선비에게 도에 대하여 말해줄 수 없습니다. 배운 것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대는 강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야 당신의 보잘것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그대에게 ‘큰 이치[大理]’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하의 물 중에 바다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며, 잠시도 멈추지 않는 데도 받다는 차고 넘치지 않습니다. 나 또한 잠시도 쉬지 않고 어디론가 흘러나가지만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봄이나 가을에도 변화가 없고, 장마가 지나 가뭄이 들어도 영향이 없습니다. 이 바다가 장강이나 황하의 흐름보다 얼마나 방대한 것인가는 수량으로 계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많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 모습을 하늘과 땅과 비교해봅니다. 나는 하늘과 땅으로부터 형체를 물려받았고, 음과 양으로부터 기운을 물려받았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작은 나무나 작은 돌이 마치 큰산에 있는 것이나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나의 존재를 작게 보고 있는데 어찌 스스로 크다고 생각할 리 있겠습니까? 사방의 바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크기를 헤아려보면, 소라 구멍이 큰 연못가에 나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거대한 중국도 세상에 차지하는 크기를 헤아려보면 큰 창고 속에 있는 쌀알 한 톨 같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만물이라 말하지요. 사람은 만물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곡식들이 생산되는 곳과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에 널리 살고 있는데, 누구든 그중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물에 비교해 본다면 말의 몸에 있는 하나의 가는 털에 지나지 않는다. 오제가 천자 자리를 서로 물려준 것이나, 삼왕에 이르러 서로 다툰 것이나, 어진 사람이 근심하는 것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수고를 하는 것이나 모두가 이와 같이 작은 일입니다. 백이는 왕위를 사양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공자는 육경을 논해 박식하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다면, 당신이 조금 전까지 스스로 물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여기며 기뻐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추수 1>
이 글에 등장하는 것은 황하의 신 하백(河伯)과 북해의 신 약(若)이다. 가을 홍수철이 되어 거대하게 불어난 자신의 모습을 감탄하면 뻐기던 하백은 북해에 도달해 자신이 얼마나 초래한 존재였는지 깨닫는다. 그런데 왠 걸. 북해의 신 약은 자신은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 거대한 물이지만 하늘과 땅에 비교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고백한다. 바다에 비하면 강물은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지만, 우주에 비하면 바다 역시 참으로 작디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논의는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우주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인간 역시 만물의 하나에 불과하면,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일개 인간일 뿐이라는 것. 절의가 뛰어나다는 백의나 학식이 뛰어나다는 공자도 마찬가지. 이런 처지를 알지 못하고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다 할 수 있다. 중국 역시 크다지만 창고에 쌀알 한 톨에 불과하다는 장자의 비유를 접하면 장자의 상상력의 끝이 어디까지 이를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이러한 장자의 시선을 계승한 현대과학자가 있으니,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 하나’라 표현했던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이다. 그는 이 책의 내용으로 네셔널 지오그라피에서 13부작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마지막 편이 앤 드리앤이 감독한 <창백한 푸른 점(Unafraid of the Dark)>이다. 여기서 나레이터로 나선 칼 세이건이 보이저 호에서 띄어보낸 지구의 영상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워낙 명문이라 전문을 인용한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인류가 이주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을 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인류는 당분간 지구에서 버텨야 합니다. 천문학을 공부하면 겸손해지고, 인격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인류가 느끼는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멀리서 보여주는 이 사진입니다. 제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추신> 세이건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https://youtu.be/x-KnsdKWNpQ
이를 좀더 설득력있는 자료로 편집한 동영상도 있다. https://youtu.be/yAx2eprm-g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