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 맛 10 - 아름다움의 기준
설결이 스승 왕예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두 다 옳다고 할 만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아는 게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그렇다면 뭔가는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그래도 내 한 번 말해보마. 내가 안다고 한 것이 모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느냐? 내가 모른다고 한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느냐? 내가 너에게 물어보마.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에 병이 나고 죽게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렇더냐?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 두려워 벌벌 떠는데 원숭이도 그렇더냐? 그렇다면 사람, 미꾸라지, 원숭이 중에서 누가 거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냐?
사람들은 소, 양. 개, 돼지를 잡아먹고, 고라니와 사슴은 부드러운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잘 먹고, 솔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이들 중에서 누가 맛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냐?원숭이는 원숭이를 짝으로 여기고, 사슴은 사슴끼리 사귀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논다. 사람들은 모장과 여희를 미인이라 여기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하늘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와 사슴은 숲속으로 뛰어 달아난다. 이들 중에서 누가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냐? 내가 보기에는 사랑과 정의의 기준이나 옳고 그름의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구나.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 <제물론> 18
일찍이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라”고 제자 자로에게 충언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본문에서 왕예는 제자에게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는 말을 네 차례나 던진다.
모른다는 말인가? 안다는 말인가? 왕예의 설명을 들어보면 더욱 복잡해진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모르는 것일까? 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안다는 것일까? 알지만 모를 수 있나? 모르지만 알 수 있나?
왕예의 입장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해체하고, 사태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제대로 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태도는 좁은 틀에 갇혀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순함을 부수고, 다양한 비교를 통해 이해의 지평을 넓힌다는 점에서는 유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뭔가 결단하고 결정하는 데에는 결정장애를 겪을 수도 있다. 잘못된 결정으로 많은 피해를 보지 않는 것보다는 일단유보의 자세가 신중하다 말할 수 있지만, 자칫 우유부단으로 비난을 당할 수도 있다. 제자인 설결에 입장에서 보자면 왕예의 입장이 답답할 것이다.
왕예의 입장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 의미의 무한연기, 진리의 텍스트를 해체함으로 사랑의 윤리학의 정초했던 데리다처럼, 왕예의 입장은 인의(仁義)와 시비(是非)로 경직화된 당대사회의 윤리학에 경고장을 발부한 것일 수도 있다.
인(仁)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불사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윤리학이 얼마나 많은 민중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가? 시비(是非)를 따지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던 민중은 그 얼마나 많았던가? 왕예는 판결을 하는 재판장의 입장이 아니라 무지랭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닫힌 입을 대변하는 변호사의 입장이 아니었을까? 사람의 목숨은 천금과도 같은 것이니, 쉽게 판단하지 말자고, 조그만 더 깊이 생각해보자고,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