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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맛 61 : 우주만물이 걷는 길

짠맛 9 - 노자가 알려주는 자유의 길

by 김경윤

공자가 노자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은 한가하시니, 지극한 도[至道]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십시오.”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금식하고 금욕하세요.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신을 맑게 씻어내고,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도는 그윽하고 아득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그대를 위해 대강을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밝게 드러나는 것들은 깊은 어두움 속에서 생겨납니다.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지요. 사람의 정신 역시 지극한 도에서 생겨나며, 육체는 순수한 기운의 화합에서 생겨납니다. 이 화합이 형체를 낳고, 형체들이 또 서로 형체를 생기게 합니다.

아홉 구멍을 가진 것들은 자궁에서 태어나고, 여덟 구멍을 가진 것들은 알에서 태어납니다. 이들은 흔적 없이 왔다가 자취 없이 떠나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끝이 없습니다. 드나드는 문도 없고 머물 방도 없이 사방으로 트여있습니다.

지극한 도를 따르는 사람은 신체가 튼튼하고, 생각이 활발하고, 눈귀가 밝고, 마음씀이 편안하고, 무엇을 만나도 자유롭습니다. 하늘도 지극한 도를 따라 높고, 땅도 이 도를 따라 넓고, 해와 달도 이 도를 따라 움직입니다. 만물이 이 도를 따라 번창합니다. 이것이 지극한 도입니다.”

<지북유> 8

도(道)는 길이다. 지극한 도는 모든 우주와 만물이 따르는 길이다. 과학과 수학의 세계에서는 이를 법칙이라 한다. 법칙은 인위적이지 않다. 본래 그러한 것일 뿐, 제멋대로 바뀌지 않는다. 생각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가에서는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을, 인간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길을 따른다고 말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이 길을 바꿀 수 없다. 보통사람은 이 길을 고통[苦]이라고 말한다.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라 집착하기 때문이다. 본질이 고통이 아니라 집착이 고통을 낳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가는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는다. 본래 모습 그대로를 깨닫게 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있는 것 그대로를 볼 수 있다. 이를 바르게-봄[正見]이라 한다. 바르게 보면 바르게 생각[正思]할 수 있고,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르게 살[正命] 수 있다.

그러면 바르게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가에서는 그 원인을 탐진치(貪瞋痴)에서 찾는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야말로 지극한 도를 알지 못하는 원인이다. 그래서일까? 공자가 노자에게 ‘지극한 도[至道]를 물었을 때, 재계(齋戒)하라고 대답한다. 몸과 마음을 굶기는 것,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재계다. 편견과 속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말로 꾸미고, ’지혜‘라는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탐진치로 거칠어진 ’나‘라는 뿌연 렌즈를 맑히는 것이다. 쓰레기로 가득찬 몸과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여기가 출발이다.

모든 깨달음의 시작은 몸에서부터다. 최상급의 지혜 역시 몸에서 나온다.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몸의 모습과 변화를 보는 것에서 지혜는 시작된다. 장자는 노자의 입을 빌어 지혜의 차원과 몸의 차원의 같음을 이야기한다. 몸은 말과 글이 형성되기 이전의 차원이다. 본래 그대로의 시원적 차원에서 지극한 도를 관찰한다. 시작도 끝도 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그렇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궁궁무진의 세계, 그 세계가 따르는 지극한 길을 바라보자.

그럴 때 노자는 약속한다. 그 길을 따르면 “신체가 튼튼하고, 생각이 활발하고, 눈귀가 밝고, 마음씀이 편안하고, 무엇을 만나도 자유롭”게 된다고. 니체라면 이 지극한 길을 운명애(運命愛, Amor fati)라고 말했으리라. 이 길은 닫힌 길이 아니라 열린 길이다. 막힌 길이 아니라 뚫린 길이다. 고정된 길이 아니라 변화하는 길이다. 그 길, 있는 그대로만 보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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