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관점에서 새로 쓰는 노자 <도뎍경>
마르크스의 어법을 차용하자면,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성(性)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이 투쟁의 승자는 항상 남성이었습니다. 다른 부족과 여성을 교환했던 원시시대로부터 인터넷과 인공지능을 무장한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은 늘 여성을 지배해왔습니다. 모성애(母性愛)란 이름으로 성역할을 규정하고, 신사도(紳士道)란 이름으로 여성을 보호하고, 어머니날을 제정하여 여성을 찬양하면서 여성을 항상 틀 안에 가둬놓고 남성중심적 사회를 유지해왔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철저히 가부장적 질서에 입각하여 분석한 정신현상학입니다. 학문의 중립성이란 말은 오랜 역사 속에서 학문의 남성성의 다른 말에 다름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문은 남성중심의 영역이었습니다. 철학, 과학뿐만 아니라 글쓰기 또한 그러했습니다. 근대 이전의 여성 철학자, 과학자, 작가는 두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니 정신분석학이라고 다르겠습니까?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또한 아들과 아버지의 대결일 뿐, 어머니는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음양오행을 전통으로 하는 동아시아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음양의 원리가 남녀평등의 원리는 아니었습니다. 음양으로 64괘를 구성하는 《주역》의 서사 역시 철저히 남성중심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이 주역으로 나선 적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남성의 영광 이면에는 항상 여성의 오욕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사태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김훈을 초청작가로 모시고 대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김훈의 소설에서 여성이 심도깊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 김훈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나는 여성을 잘 모른다. 그래서 자세히 다룰 수 없었다.” 이 무지(無知)의 고백으로 더이상 진도를 나가지는 못했지만, 김훈의 대답은 적어도 나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여성을 잘 아는가?” 나에게 자문해보았습니다. 나 역시 대답은 ‘잘 모른다.’ 였습니다.
무지의 고백은 출발점으로는 훌륭한 자세이되, 그것으로 자신의 태도를 퉁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무지를 고백할 뿐 아니라 무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존재의 인식은 자아의 인식과 더불어 타자의 인식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과 더불어 남성 역시 페미니즘 공부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부와 실천에 가장 앞장서야 할 사람이 작가입니다. 작가야말로 경계에 서서,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니까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