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대학》을 다시 읽으며

-《대학》 묻고 따져 읽기 1

by 김경윤

《대학》은 참 이상한 책이다. 저자가 공자의 제자인 증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송나라 학자 주자(주희)의 주장일 뿐, 지금도 확정된 바가 없다. 즉, 작가 미상이다. 증자(나 동시대인)가 썼다면 기원전 5세기 경 작품이 된다. 본래 따로 전승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부터 《예기》의 42편에 편입되어 전해졌고, 기원후 1천 년쯤 되던 송나라 때 별도로 다루어지다가 주자에 이르러 《논어》, 《맹자》, 《중용》과 더불어 새로운 유학을 공부하는 자의 필독서로 정해진 4권 중 한 권으로 격상되었다.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한 지 천오백 년이 지나서야 주목을 받은 것이니, 기적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희는 이 네 권이야말로 유학의 핵심이라는 ‘사서읽기운동’을 펼친 시대의 개혁가였다.

《대학》은 다행히도 분량이 아주 적다. 논어가 12,700자, 맹자가 24.685자, 중용이 3,545자로 구성되었는데, 대학은 꼴랑 1,747자다. 본문에 해당하는 경(經)이 205자, 그에 대한 해설 또는 주석에 해당하는 전(傳)이 1,542자이다. 본래는 장절조차 구분이 안 되어있었지만, 주자가 장과 절을 나누어 편찬하였다. 그게 바로 《대학장구》다. 지금의 출판물로 말하자면 소책자도 되지 못하고 팜플렛이나 유인물 정도의 분량이라 할 수 있다. 한글로 번역해도 A4 용지 10장이면 넉넉하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경전에 해당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경전, 대학

내용이 복잡하냐면 그도 아니다. 배움의 정신인 3강령과 배움의 영역인 8조목 등 11개의 항목에 대해 나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배움의 목적은 무엇인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러한 배움은 어떠한 효과를 낳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주자도 사서 중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할 책으로 《대학》을 꼽았다. 그러니 평심하게 읽으면 어려울 것도 없다. 《대학》을 읽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은 그것이 쓰여졌을 당시에 지식인들의 필수교양지식에 해당하는 《시경》이나 《서경》들을 오늘날 우리는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는 시대적 격차감 때문일 것이다. (《대학》은 자신의 논거로 이 필수교양서적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격차감은 비단 《대학》을 읽을 때만 생기는 일이 아니다. 동서양의 고전 전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분량도 매우 짧고, 내용도 단순명쾌하니까 읽어보자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짧고 명쾌한 책이라고 하더라도 천 년도 넘은 책을 읽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면. 오래된 책이 모두 좋은 책은 아니다. 낡은 생각을 굳이 오늘날 되살릴 필요는 없다.

내가 21세기가 20년이나 지난 오늘날 《대학》을, 그것도 따져가며 읽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오늘날처럼 배움이 혼돈의 시기를 맞이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혼돈(混沌)이라는 말은 양가성을 띤다. 기존 지식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흐름이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지만, 그 새로움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는 불안할 수 있다. 배움의 전수가 핵심을 이뤘던 근대화과정은 이미 시대를 마감하고 있고, 새로운 배움을 창조해야할 미래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런데 우리 눈앞은 맑고 화창한 봄날 하늘이 아니라 황사먼지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뿌였다. 우리의 교육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말은 누구나 하지만 정작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모두들 망설이고 있는 실정이다.


혼돈, 앞날이 안 보이는 교육현실

시대가 혼돈기일 때 많은 개혁가들은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의 외침이 아니라, 혼돈기에 놓쳐서는 안 되는 근본정신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분과학문으로 갈갈이 찢겨진 교육현실, 경제적 가치가 최고로 취급되는 사회현실, 경쟁과 성공을 통해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개인현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은 방관해야할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것이다.

교육현장으로만 집중해보자면, 21세기를 살고있는 아이들에게, 20세기의 교사가 19세기의 교육현장에서, 18세기의 교육정신을 가르치고 있는 꼴이다. 지식전달과 습득, 그에 따른 시험과 입시를 통해서는 혼돈만을 가중시킬 뿐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없다. 이미 학생들의 정보력은 선생을 능가하고 있으며, 과거의 정신과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접근하는 한 교사의 권위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다. 제도교육의 현장은 제도감옥으로 전락하다가 결국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다.

4차산업 혁명이 왔다며 교육방법을 디지털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도 본말이 뒤집힌 접근법이다. 교육의 근본정신을 다시 사고하지 않는 한, 교육의 편의성을 위한 방법의 전환은 수많은 노고에도 불구하고 교육현장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도 있다. 코로나 시대에 등교가 불가능해지면서 대부분 비대면 화상교육으로 전환하자, 이럴꺼면 유명한 강사로 대처하고 교원의 수를 줄이고, 학교의 기능을 축소하자는 기술주의적 발언들이 쏟아졌다. 그런 논리라면 대학도 불필요할지 모른다. 이미 유수한 세계의 대학이 인터넷을 통해 아주 싼 가격으로 교육내용을 송신하고 있다. 대학졸업증 획득만 아니라면 어렵사리 공부해서 입학하고 굳이 비싼 등록금을 주고 지루한 강의를 들어야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첨단화는 결코 교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첨단기술이 능사는 아니다.


교육의 편의성, 첨단기술이 능사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에 향후에 석유에너지가 고갈되고 이를 대처할만한 에너지의 개발이 불충분하여 지금 쓰고 있는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면 학교 현장은 어떻게 될까? 교육이 불가능해질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인터넷과 SNS는 안정적이고 충분한 전기에너지의 공급에 기반한 것이다. 8만원 정도면 무한정 사용할 수 있다는 스마트폰의 에너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연의 산물이 아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무한정 쓸 수 있는 에너지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첨단기술과 인터넷을 기반으로한 교육현장의 전환은 핑크빛으로 물들여있지 않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어도 안전한 사회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기후위기가 닥칠 것이다. 기후 위기는 에너지 위기뿐만 아니라 식량위기와 생존 자체의 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것이다. 역병의 펜더믹화와 기후위기의 문제, 식량과 자원 위기의 문제는 일국적 차원에 머물지도 않을 것이고, 결코 한 나라의 지혜로 막아낼 수도 없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이다. 나 하나 잘 한다고 나의 생존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통해 여실히 경험하였다. 교육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단지 교육현장의 붕괴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현장이 안정성을 잃은 지는 한참 전의 일이다. 한해에 산업재해로 죽는 노동자의 수가 2천명이 넘는다. 코로나로 죽은 사람보다 많은 숫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철벽이 둘러쳐져 있고, 그에 따른 수입의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출산율은 전 세계에서 꼴찌이고, 자살률은 전 세계의 1위이다. 노동의 붕괴가 사회적 안전망의 붕괴를 초래하는 것은 자명하다. 식량자급률 역시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속한다. 청년층이 주장하는 공정성의 문제도 능력주의에 기반하는 한 폭정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마이클 샌델). 영혼을 끌어들여 부동산에 투자하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는 나라를 건강한 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웃으로 확장되고, 타자를 배려하는 건강한 개인주의가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이기주의로 전락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 교육과 경제, 사회와 정신세계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땅이 무너지는데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은 없다. 희망은 없는가? 새로운 교육과 문명의 패러다임을 숙고할 때이다.


새로운 교육과 문명의 패러다임

그 새로운 교육과 문명의 패러다임을 숙고하기 위해 고른 고전이 《대학》이다. 나는 유학자가 아니니 《대학》을 숭상하지 않는다. 유학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높이 받들고 따라야할 ‘내부문건’이지만, 현대인인 나에게 《대학》은 오늘날을 살아가는데 참고할 수 있는 ‘하위문건(서브텍스트)’에 불과하다. 나에게 메인 텍스트는 당연히 당면한 현실과 우리의 삶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고전 중에서 유독 《대학》을 콕 집어 선택한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일단, 《대학》에서 언급하는 주제의 지구적 스케일 때문이다. 만물에서 시작하여 나로 수렴되고, 다시 나에게서 펴져나가 천하로 이어지는 전개방식에서 나는 자연-나(인간)-세계로 이어지는 거대서사의 사용가능성에 매료되었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자연학에서 출발하여 인식론, 심리학, 윤리학, 존재론, 관계론, 사회론, 정치론, 세계문명론의 씨앗(단초)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대학》에서는 8조목이라는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몸과 마음, 나와 너, 나와 세계의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를 좋게 만들려는 것이 공부의 궁극적 목표라는 《대학》의 삼강령은 교육의 근본적 패러다임을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과거의 지식인(유학자)들이 학문을 할 때에 분과학문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배움의 과정으로 보았던 이론과 실천적 삶의 융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학은 성선설을 기반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였고, 개인의 수양을 통해 인간을 완성할 수 있다는 휴머니즘적인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비록 군주와 지식인에 대해 집중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러한 진술은 시대적인 상황에 맞게 다시 읽어내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오늘날 견지해야할 세계시민으로서의 덕목을 유추하고 새로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고전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자아의 탐구로부터 배움을 통해 세계시민으로 확장되는 상상력의 씨앗을 《대학》은 품고 있다.

새로운 자아와 세계시민의 씨앗, 대학

그러니까 앞으로 읽어나갈 《대학》은 고전 그 자체에 말뜻이나 주석을 일일이 따져 설명하는 형태가 아니라 – 그것은 유학전문가들의 몫이다. - 《대학》에서 제공하는 개념들을 화두 삼아 본문을 따져 읽어가면서 우리의 상황과 함께 사유의 폭을 확장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연재하는 내내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대학》이란 어떤 책인가’에 대한 소개라기보다는 ‘21세기에 배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답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대학》에서 논거로 사용하는 부분들을 모두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학》에서 제공한 개념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다양한 동서양의 문헌들이나 입장들을 소개함으로써 개념들을 새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고 이용도를 높이는 것이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진술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대학》은 자신의 진술을 강화하기 위하여 주로 《시경》과 《서경》의 구절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단장(斷章)이란 전체가 아닌 부분을 인용하고, 취의(取義)란 맥락에 맞게 새롭게 뜻을 해석함을 이야기한다. 이는 대부분의 동양고전이 취하는 방식으로 당대에 누구나 인정하는 경전의 구절을 이용하여 권위를 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용된 구절이 매우 짧아,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고, 뜻을 전하는 내용도 본래의 뜻과는 차이가 있어 더욱 이해를 어렵게 한다. 또한 유학적 텍스트 안에서만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독자에게는 확장성이 매우 떨어지는 접근이다. 새롭게 《대학》을 읽는 마당에 어려움에 어려움을 더하는 방식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유학적 텍스트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개념이 다루고 있는 영역에 따라서 현대인들이 오히려 친밀하게 느끼는 다양한 학문의 새로운 견해를 제공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천문학, 물리학, 화학, 진화생물학, 심리학, 윤리학, 철학, 역사학, 문학, 경제학, 정치학의 영역 등을 다양하게 넘나들면서 개념을 확장하고픈 욕심이 생긴다. 물론 이러한 확장은 필자의 고유한 관심과 배움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이 또한 단장취의(斷章取義)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고전을 새롭게 읽는 재밌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통섭(統攝, Consilience)의 태도로 읽는 《대학》이라고나 할까.

통섭적으로 접근하는 《대학》

통섭적으로 접근한다고 해서 본래 《대학》의 내용은 싹 빼놓고 내 생각만 늘어놓겠다는 것은 아니다. 본문의 내용도 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하겠다. 그러한 바탕 하에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접근하면서 독자와 소통하는 영역을 넓히는 협업의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욕심이 성공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 모름의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쓰기는 기존의 앎의 영역을 지우고 모름의 영역을 확장할수록 더 많은 창의적 가능성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게 요즘 생각이다. 모름은 모색의 출발점이니까. 모색을 하다가 실패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더 나은 실패를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나아간 것이고, 그만큼 안개가 옅어질 것이다. 일단 그렇게 믿기로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배움만 지속될 수 있다면, 앎의 영역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희미하게 옅어진 부분을 새롭게 채워가는 재미도 있고,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를 벗어나 유연해질 수도 있다. 내 의견만 옳다고 옹고집을 피우지도 않고, 이렇게저렇게 하라는 꼰대짓도 줄어든다. 모르는 부분을 나이 어린 젊은이에게 물으면서도 부끄럽지 않다. 아마도 나는 이글을 쓰면서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주변에 물을 사람이 있다는 건 또 다른 축복이 될 터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이 글이 하나의 물음이라고 생각하길 바란다. 배움에 정답은 없으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물으며 살아가야 하니까.

어쨌든 새롭게 글을 시작되었고, 앞으로 연재할 내용을 (가)제목만 소개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2. 배움의 빅 아이디어(Big-Idea) - 21세기에 배움이란 무엇인가?

3. 배움의 우주론 : 격물(格物) - 만물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4, 배움의 인식론 : 치지(致知) - 앎은 어떻게 가능한가?

5. 배움의 수양론 : 성의(誠意) - 배움의 의지는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

6. 배움의 심리론 : 정심(正心) -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7. 배움의 존재론 : 수신(修身) - 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8. 배움의 관계론 : 제가(齊家) - 타자와 어떻게 지낼 것인가?

9. 배움의 정치론 : 치국(治國) - 공동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10. 배움의 세계론 : 평천하(平天下) - 세계평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제목을 정해놓고 나니 모두가 질문이로구나. 좋다. 여기서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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