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작가론 39 :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작가의 관점에서 새로 쓰는 노자 <도덕경>

by 김경윤
원고지 노자명상 1039.jpg

인간은 오감(五感)이라는 것이 있어서 항상 외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라 합니다. 시각, 청각, 후가, 미각, 촉각이지요. 이러한 오감이 종합되어 생겨난 인식을 법(法)이라 합니다. 합쳐서 육진(六塵)이라 말하지요. ‘육진’이라 말할 때의 ‘진(塵)’은 먼지, 티끌을 뜻합니다. 인간의 감각에 대한 불신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질러 말합니다. 인간의 경험한 감각계를 영원하지 않으며,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질 뿐입니다. 실체가 없으니 공(空)합니다.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오감의 즐거움을 인생의 낙으로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경탄하고, 멋진 노래에 박수를 보내며, 향기로운 꽃향기에 취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나눌 때의 즐거움은 정말로 큽니다. 연인의 손을 잡을 때의 그 부드럽고 따스함이란. 비록 일시적인 현상이라도 순간을 영원과도 맞바꿀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이여 영원하라. 찬양하고 노래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글을 쓸 때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쓴다고 합니다. 물론 시끄러운 락음악을 틀지는 않겠지요. 아마도 부드러운 재즈음악이나 가사가 없는 고전음악을 틀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 역시 때때로 글을 쓸 때 조용한 음악을 틀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음악은 음악감상용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배음(背音)과 같은 것입니다. 음악에 취해서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소리가 글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글을 쓸 때는 소리는 물러납니다.


얕은 생각은 오감의 영향을 받습니다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오감을 떠납니다. 생각의 심연에 도달하면 침묵의 세계가 열립니다. 얕은 생각은 앉아 있으면서도 외부를 향해 달립니다. 장자는 이를 ‘좌치(坐馳)’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깊은 생각은 박힌 돌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고요히 침잠하는 것을 명상(瞑想)이라 합니다. 자신의 외부가 아니라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글은 그렇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마르지 않는 맑은 샘물과 같습니다.


생각이 잘 안 떠오르거나, 글이 잘 써지 않는다면 오감을 자극하는 외부를 잠재울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가 잠잘 때 내면은 깨어납니다. 그 내면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글은 맑아지고 깊어집니다. 그리고 그 맑고 깊은 눈을 떠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될 때,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글은 그 다른 세계에 거주하는 시민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쓰메 소세키를 읽기 위한 예비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