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시절에 우정을 생각한다

우정과 지혜의 공동체, 백탑파 이야기

by 김경윤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

- 에피쿠로스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 이탁오


마음에 맞는 계절에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詩文)을 읽으면,

이는 최상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지극히 드문 것이어서 일생을 통틀어도 모두 몇 번에 불과하다.

-이덕무


1. 우정과 지혜의 공동체, 백탑파


동아일보의 정성희는 백탑파를 이렇게 기록한다.


종로3가 탑골공원 내 백탑(오른쪽 위치)

“지금 서울 중심에 남산 송신탑이 있다면 18세기 조선에는 백탑(白塔)이 있었다. 백탑은 서울 종로3가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2호)을 말한다. 단종을 죽이고 보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며 원각사를 창건했다. 그때 만들어진 10층 석탑은 우리나라에선 드물게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백탑으로 불린다. 백탑은 고층건물이 없던 조선시대 한양 한복판에 높이 솟아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정조 집권기인 18세기 후반, 상공업의 발달로 한창 변화하는 도성의 중심가에 모여 살며 교류하던 젊은 학자들이 있었다. 백탑 주변 탑골에 살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과 남산 자락에 살았던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가 그들이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곤궁함 속에서도 이들은 한양 남북을 잇는 수표교를 부지런히 오가며 서얼 신분과 연령의 벽을 넘어 우정을 쌓는다. 서상수의 사랑방에서 거문고의 대가 홍대용이 거문고를 뜯으면 이덕무가 시를 짓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이들은 단순히 풍류를 나누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라를 변혁시키고자 했다. 흔히들 실학자 중 북학파라고 알려진 이들이 바로 ‘백탑파’다. 200여 년 전 조선의 주류 사상이었던 성리학을 거부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고 했던 ‘젊은 그들’이었다.”


그래. 젊은 그들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곤궁한 속에서도 신분과 연령의 벽을 넘어 우정을 쌓았던. 그래서 나는 이들을 우정과 지혜의 공동체라 부르리라. 이들을 위해 새로 말도 만들었다. 필리아소피(philiasophy)! 우정과 지혜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우선 나이 순으로 따져보면 정철조(1730년생), 홍대용(1731년생), 박지원(1737년생), 이덕무(1741년생), 백동수(1743년생), 유득공(1748년생) 그리고 막내뻘인 박제가(1750년생)와 이서구(1754년생)이다. 위 아래로 치자면 20살이나 격차가 난다. 홍대용, 정철조, 박지원은 명문세가의 자식이었지만, 이덕무, 백동수,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서자였다. 그런데 박지원은 과거에 관심이 없었고, 홍대용이나 정철조는 양반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을 과학자와 공학자였다. 그러니까 양반들도 마이너에 해당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백성들의 이용후생에는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후대에 이들을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 불렀던 것은 이들의 관심사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철학이 아니라 실제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학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정철조와 홍대용이 고문격이었다면, 박지원이 좌장역할을 하고, 중간에서 이덕무가 후배와 선배의 가교를 맺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정조의 탕평책과 서얼중용정책이 아니었다면, 서자그룹은 관직에 한 번도 나가지 못할 처지였다. 정조는 이들의 재주를 높이사서 규장각의 사서 자리를 내어주었다.


2. 우정, 차별 없이 유쾌하게


그럼 이들의 우정은 어떠했던가? 이덕무는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우정에 관해 이렇게 기록했다.

“만약 내가 지기(知己)를 얻는다면 이렇게 하겠다.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인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 햇볕에 말려서 아내로 하여금 강한 바늘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한 다음,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옥으로 축을 만들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있는 곳에다 걸어놓고 말없이 바라보다가 저물녘에 돌아오리라.”


지기(知己)를 얻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인가? 정성이 지극하다. 정인(情人)이 있다면 분명 시샘하였으리라. 이덕무는 어떤 사람인가? “가난해서 반 꿰미의 돈도 저축하지 못한 주제에 천하의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은택을 베풀려 하고, 노둔해서 한 부(部)의 책도 통독하지 못한 주제에 만고의 경사(經史)와 총패(叢稗)를 다 보려 하니, 이는 오활한 자가 아니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 이덕무야! 아, 이덕무야! 바로 네가 그렇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난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죽이나 책을 좋아했으면 자신을 일컬어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라 했겠는가?


이덕무의 가난은 가히 가공스럽다. 그가 직접 쓴 글을 보자

지난 경진년ㆍ신사년 겨울에 내 작은 초가(草家)가 너무 추워서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어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나의 게으른 성격으로도 밤중에 일어나서 창졸간에《한서(漢書)》1질(帙)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으니, 이러지 아니하였다면 거의 후산(後山)의 귀신이 될 뻔하였다.

어젯밤에 집 서북 구석에서 독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등불이 몹시 흔들렸다. 한참을 생각하다가《노론(魯論)》1권을 뽑아서 바람을 막아 놓고 스스로 변통하는 수단을 자랑하였다. 옛사람이 갈대꽃으로 이불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또 금은(金銀)으로 상서로운 금수(禽獸)를 조각하여 병풍을 만든 자도 있는데 이는 너무 사치스러워 본받을 것이 없다. 어찌 나의 경사(經史)로 만든《한서》이불과 《노론》병풍만 하겠는가. 또한 왕장(王章)이 우의(牛衣)를 덮은 것과 두보(杜甫)가 마천(馬韉)을 덮은 것보다 낫다.

을유년 겨울 11월 28일에 기록한다.


한서 이불, 논어 병풍이라. 청빈을 넘어 극빈의 처지에도 자신보다 더 비참한 인물을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한다. 이런 글도 있다.

“을유년(乙酉年 : 1765) 11월에 형재(炯齋 : 이덕무의 서재)가 추워서 뜰 아래 작은 모옥(茅屋)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집은 매우 누추해 벽에 얼어붙은 얼음이 뺨을 비추고 구들의 그을음 때문에 눈이 시큰거릴 지경이었다. 아랫목이 울퉁불퉁해 그릇을 놓으면 물이 반드시 엎질러지고, 햇살이 비추면 쌓인 눈이 녹아 흘러 썩은 띠 풀에서 누런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방울 물일망정 손님의 도포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곤 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거듭 사과했지만 나태한 성품 탓에 집을 수리하지 못했다.

어린 아우와 함께 서로 그대로 지낸 지 무릇 석 달이나 되었지만 오히려 글 읽는 소리만은 그칠 줄 몰랐다. 세 차례나 큰 눈을 겪었는데 매번 한 차례 눈이 올 때마다 이웃에 사는 작달만한 키의 노인이 반드시 새벽에 빗자루를 들고 와서 문을 두드리며 중얼중얼 혼잣말로 ‘가련하구나! 연약한 수재(秀才)가 얼어 죽지나 않았는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눈을 쓸어 먼저 길을 낸 다음 문 밖에 있는 눈 덮인 신발을 찾아내 눈을 탈탈 털어내고 말끔하게 청소했다. 쌓인 눈은 둥근 모양으로 세 덩어리를 만들어놓았다. 나는 이미 이불 속에서 고서(古書)를 벌써 서너 편이나 외웠다.”


하지만 그는 아무나 벗하지 아니하였다. 신세는 처량하였으되 제법 친구를 까다롭게 가려 기준이 엄격하였다.

“벼슬로 서로 유혹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권세와 이익으로 서로 의지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장기 바둑이나 놓고 술이나 마시고 해학하며 떠들썩하게 웃는 사람은 벗이 아니요, 시문(詩文)ㆍ서화(書畫)ㆍ기예(技藝)로 서로 잘한다고 허여하는 사람은 벗이 아니다. 아! 오늘날의 이른바 우도(友道)란 것을 내가 매우 슬퍼하는 바이다.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名節)을 서로 부지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임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그는 친구끼리 너나들이하고 쉽게 천한 별명을 붙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다. 까칠한 사람이다.

“오늘날의 이른바 벗들은 걸핏하면 서로 욕설을 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아들이니 손자니 사위니 조카니 하고 부르고, 또는 말이니 소니 개니 돼지니 하고 부르며, 성명을 파자(破字)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침범하기도 한다. 추하고 패악한 말을 마구 주고받음으로써 인륜 도덕을 전연 무시하는데, 그것을 예사로 들어 해괴하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와 같이 않으면 친밀한 벗이 될 수 없다.’한다.

아!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막연히 알지 못하는데 다만 집안에 불초한 자손을 둠으로써 날마다 경박한 자들의 추한 욕을 받게 된다. 이것은 또한 자손을 잘 가르치지 못한 때문이니,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군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없겠는가? 내가 만약 저 사람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침범하면 저 사람도 즉시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욕할 것이라는 것을 밝게 안다면 어찌 차마 욕할 수 있겠는가? 인륜의 패멸이 말 한마디에 달려 있으니, 이 얼마나 불인(不仁)한 일인가?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날마다 삼생(三牲)을 잡아서 봉양한다 하더라도 집안의 패자(悖子)요, 나라의 난민(亂民)이요, 명교(名敎)의 죄인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부유한 처지를 부러워하지 않고 담담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처지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술값을 나눠낼 때 - 요즘말로 더치 페이? -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시절이나 명절 때에 벗들이 즐겁게 놀기 위하여 주식대를 추렴하자고 하거든 인색하거나 피하거나 억지로 응락하거나 하지 말라. 만일 가난해서 제공할 것이 없더라도 부끄러워 하지 말고 구차하게 마련하여 가난을 숨기려고 하지도 말며, 나는 준비됐다고 해서 준비 못한 사람을 조소하지도 말라.” 이 얼마나 쿨한가.

이렇게 까칠하지만 솔직한 이덕무가 가장 애정했던 모임이 바로 백탑모임이었다. 그들은 백탑(원각사지 10층 석탑) 근처에 살면서 서로 모여 우정을 나눴다. 물론 이덕무는 유머담당은 아니었고, 말없이 이 모임에 참석하는 얌전쟁이였다. 하루는 한양의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1732-1812) 집에 여러 사람이 모였다. 한 참석자가 훗날 성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날 모임을 이렇게 회상했다.


"초정(楚亭.박제가)과 냉재(冷齋.유득공)는 악인연이라

기묘한 조롱과 해학으로 막상막하 다투네

오후에는 청장관(靑莊館.이덕무)이 교감을 마치고서

소리 없이 걸어와서는 백중간에 서네

성흠(聖欽. 이희명)은 훤칠한 키가 마치 황새 같으나

콜록콜록 객혈하고는 끙끙대며 신음하네

바로 이 때 청성(靑城.성대중)이 주인이 되어

드높게 앉은 자리 다른 산을 내려다보네

한 자리는 비워두고는 뚱뚱한 나를 앉게 하니

곤륜산 옥(玉) 사이에 괴석(怪石)이 끼어든 꼴이라

거리낌없이 돌아가며 희극을 하느라고

천상부터 지하까지 모든 일을 짓까부네."


이것이 조선후기 유명한 백탑파(白塔派) 문인들의 회합 모습이다. 여기서 말하는 "뚱뚱한 나'라는 화자(話者)는 이기원(李箕元. 1745-?)이다. 그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재종형인 박명원(朴明源) - 후일 박명원이 정사가 되어 청나라로 사신을 갈 때 연암이 그의 자제군관으로 사신행렬을 따라 가니, 그 때를 기록한 일기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 의 측근으로 연암이 주도한 '백탑파'모임에 참여했다. 시에 나타나는 비워있는 한 자리를 아마 연암의 자리였을 것이다.


시에도 나타나듯이 박제가와 유득공은 마치 톰과 제리 같은 사이였나보다.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이다. 이기원의 증언에 따르면 유득공은 박제가를 이렇게 놀렸다고 한다. "키가 서너 치 더 크고 그림을 잘하기만 하면야 천하에 명성을 따를 자 그 누구겠나!" 아마도 박제가가 단신에 그림을 못 그렸나보다. 하지만 박제가는 글씨는 명필이라 훗날 김정희의 스승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게다가 박제가는 한꺼번에 만두 백 개, 냉면은 세 그릇이나 먹는 대식가(大食家)였다.


박제가는 백탑파의 모임을 이렇게 추억한다.


백탑파의 막내뻘인 박재가. 서자 출신

“성이 빙 둘러 있는데 탑은 그 가운데 있다. 멀리서 보면 뾰족하게 솟아 마치 눈 맞은 대나무에 죽순이 나온 듯하다. 백탑은 바로 원각사의 옛 터에 있다.

지난 무자년(1768)과 기축년(1769)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여덟, 열아홉이었다. 연암 박지원(1737~1805) 선생이 문장에 조예가 깊어 당대에 으뜸이라는 소리를 듣고 백탑의 북쪽에 가서 뵈었다. 선생께서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옷을 걸치고 나와 맞으시는데,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내 손을 잡아 주셨다. 그러고는 선생께서 지은 글을 꺼내 나에게 읽어 보도록 해 주셨다.

선생은 몸소 쌀을 일어 솥에 안치시고, 밥이 다 되자 그릇에 담아 소반에 올려 내오시고 술을 주시며 축수(祝壽)하셨다. 나는 선생의 지나친 환대에 놀라며, 이는 천고에 없는 성대한 일이라 여기고 글을 지어 보답했다. 마음을 기울여 사모한 모습과 서로 알아주던 마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때 형암 이덕무(1741~1793)의 집이 백탑 북쪽에 있었고, 낙서 이서구(1754~1825)의 사랑이 백탑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수십 걸음을 가면 서상수(1735~1793)의 서루(書樓)가 있었고, 다시 꺾어서 북동쪽으로 가면 유금(1741~1788)과 유득공(1749~1807)이 살고 있었다. 나는 한 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무르곤 했다. 시문(詩文)이나 척독(尺牘, 편지)이 책을 이루고, 술과 음식을 쫓아다니는데 밤에서 낮까지 이어졌다.

일찍이 내가 장가가던 날 저녁, 장인어른의 좋은 말을 빌려 안장을 벗기고 타고는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왔다. 이때 달빛이 길에 가득했다. 이현궁 앞을 따라 말을 몰아 서쪽으로 달려 철교(鐵橋) 술집에 이르러 술을 마셨다. 북소리가 삼경을 알리는데 여러 벗들의 집을 거쳐 탑을 돌고 나왔다. 당시 호사가들은 이 일을 왕양명 선생이 철주관 도사를 방문했던 일에 비기곤 했다.

그 뒤 지금까지 6~7년이 흐른 사이에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가난과 병이 날마다 찾아와 가끔 서로 만나도 각자 별 탈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 풍류도 옛날보다 못하고 얼굴도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비로소 벗과 노닒에 진실로 성쇠(盛衰)가 있고 각각 한때뿐임을 알았다.

중국 사람들은 벗을 자기 목숨처럼 여긴다. 그래서 왕사정 선생은 〈육가숙과 매경곤이 달밤에 돌아다니다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라는 글을 지었고, 소장형은 책 속에서 그때 이웃과의 즐거운 일을 추억하며 만나고 헤어지는 마음을 적었다. 내가 늘 이 책을 보면서 시대는 달라도 마음은 같다는 것을 느끼며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벗 이희경이 연암 선생과 이덕무 등 여러 분들과 나의 시문과 척독을 조금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이에 내가 책의 제목을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이라 하고 이렇게 서문을 써서 그때 우리들의 노닒이 성대하였음을 보이고 또 내 평생의 한두 가지 일을 들어 보인다.”


이번에는 박지원의 증언을 들어보자.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다>이다.


백탑파의 좌장격인 연암 박지원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작별 인사하고 가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으면서,

“진(秦)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獒〕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싸고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 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덕무)이 취중에 그놈의 자(字)를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연)이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 이홍유)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 유득공)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城)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조선 후기의 광통교.jpg 오계주의 <상원야회도> 조선 후기에 선비들은 이렇게 야밤중에 다리를 밟고 놀았다.

거리에서 술 마시고 노는 풍경이 가히 기가 막힌다. 달이 밝아 들렀다고 하지만 술 한 잔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당시 운종교에서 이렇게 술 먹고 노는 양반들이 꽤 되었나보다. 수표교에 도달해 닭이 울 때까지 놀았으니 날 밤을 샌 것이다.


3. 상호부조, 가난하지만 당당하게


벗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방의 상태를 알아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것이다. 또한 상대방은 궁핍한 처지에 있어도 그것을 굳이 드러내려하지 않는 것이다. 이 얼마나 힘든 법도인가? 백동수가 말년에 기린협으로 떠날 때 박제가가 그를 위해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난하고 궁색할 때 사귄 친구를 '지극한 벗'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가 아무 허물이 없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기 때문일까? 또한 요행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서로 처한 상황이 비슷하고, 겉모습이나 행적을 돌아다볼 필요가 없고, 가난이 주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을 부여잡고 수고로움을 위로할 때는 반드시 먼저 밥은 먹었는지 굶었는지, 추위에 떨거나 더위에 지치지는 않았는지를 묻고, 그런 다음 집안 살림의 형편을 물어보곤 한다. 그러다 보면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일조차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진심으로 나를 측은하게 여기는 정을 느끼고 감격하는 바람에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조차 꺼내기 힘든 형편도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에서 곧바로 쏟아져 나와 억누를 길이 없게 된다. 어떤 때는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없이 베개를 베고 잠을 청한 다음 떠나곤 한다. 그럼에도 오히려 다른 사람과 십 년간 나눈 대회보다 더 낫다.

그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친구를 사귈 때 마음과 뜻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말을 나누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벗을 사귈 때 마음의 틈이 없다면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있다고 해도 마냥 좋다.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만나도 항상 새롭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 사귄 벗도 옛 친구나 다름없네.'라는 말이 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눈물나는 구절이다.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니라 영락하여 떠나는 것이다. 백탑파의 공통점은 너무도 많지만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이 가난이었다. 그들은 처지가 나은 사람이 알아서 챙겨주었고, 정말로 필요하다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처지가 좀 나은 사람에게 당당하게 부탁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백탑파의 대부분이 서자였고, 양반이라야 벼슬자리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책을 팔아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


내 집에 가장 좋은 물건은 다만《맹자(孟子)》 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닢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의 호)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이는 자여씨(子輿氏 맹자(孟子)를 가리킨다)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생(左丘生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킨다)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리하여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이 참으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도대체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요, 당장에 팔아서 한때의 취포(醉飽)를 도모하는 것이 보다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서글픈 일이오. 족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이다. 모두 서자출신이다. 책을 읽어 세상에 나아가려하지만 서자신분의 그들에게 세상의 벽은 높기만하다. 공부는 해서 뭐하겠는가? 소중한 책을 팔아 술이나 사먹자. 진심은 아니겠으되 웃픈 에피소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박지원은 곤궁함을 견디다 못해 한참이나 어린 박제가에게 도움을 청한다. 다음 편지가 그것이다.


공자가 진(陳)나라 채(蔡)나라에서 당한 것보다 곤경이 심하나 도를 실천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안회(顔回)의 가난에 망령되이 비교하려들면 무엇을 즐기냐고 묻겠지.

무릎을 굽히지 않은지 오래인 나처럼 청렴한 인간 없음은 어쩌겠나.

꾸벅꾸벅 절하노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네.

여기 술병까지 보내니 가득 채워 보냄이 어떠한가?


편지를 받은 박제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박제가는 다음과 같이 짧게 답신을 보낸다.


열흘 간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 되어 부끄럽습니다.

200닢의 공방(孔方,돈)은 편지 들고 온 하인 편에 보냅니다.

술병은 일없습니다. 세상에 양주(楊洲)의 학(모든 기쁨을 같이 누림)은 없는 법이지요.


자, 보내는 편지나 답신이나 모두 얼마나 당당하게 천진난만한가. 이들의 우정은 이러하였다. 이러한 우정이 아니었다면 백탑파의 일원들은 분명 아사(餓死)나 객사(客死)를 면하지 못하였으리라. 가난은 이들의 숙명이었지만 가난으로 좌절하지는 않았다. 이덕무는 가난을 이렇게 적었다.


최상(最上)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최하등(最下等)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짓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또한 최하등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간다.


가난은 이들을 죽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연암 박지원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친구도 있었다. 사경(士京) 유언호(兪彦鎬, 1730~1796)이다. 유언호는 박지원이 홍국영에게 화를 입게 될까봐 한양을 떠나라고 당부하였고, 박지원이 연암에서 고생을 하자, 스스로 개성유수를 자청하여 부임한 후, 박지원을 개성 읍내로 나오게 하여 살만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살림살이를 대주었다.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벗이었다. 유언호가 연암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자.


“바야흐로 우리가 서로 마음을 합하였음에 가슴 떨리듯 통하였다가 스르르 격이 사라졌으니, 나는 알지 못하겠다. 누가 나(유언호)인지? 누가 미중(박지원)인지? 어디가 닭과 돼지가 뛰노는 연암 마을인지? 어디가 창이 늘어선 관사인지? 저 유수와 객이 거문고에 기댄 채 아무 말 없으니 어찌 믿음직한 사귐이 아니겠는가?”


유언호는 후에 박지원을 안의현감에 천거하여 오르게 하기도 했다. 평생을 벼슬 없이 지내다가 박지원이 수락한 벼슬살이였다. 가난했기에 서로 도와야했고, 가난했기에 서로 의지해야했던 백탑파. 그러나 그들은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상황이, 경제적 처지가 그들을 갈라놓고 서로를 그리워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우정은 그리움의 형태이기도 했다.


좋은 친구가 있는데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지 못하는 심정은 꽃가루를 옮기려고 찾아드는 나비를 맞는 꽃의 심정과 같다. 찾아들면 정성스럽게 맞이했다가, 잠깐 머무르면 문득 마음 아파하고, 날아가면 못 잊어 그리워한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그리워하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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