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2월 브런치에 연재한 <장자의 맛>이 출간되었습니다. 출간하면서 쓴 마지막 글은 브런치에 올리지 않았네요. 그래서 그동안 브런치의 제 글을 지속적으로 읽으셨던 독자분들을 위해 출간 후기를 올립니다.
아득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다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 장자, <천하> 15
2020년 초부터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별 거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었다. 국경이 닫히고, 가게가 닫히고, 거리두기로 관계마저 닫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집 밖을 나서기를 꺼려했고, 택배기사와 배달원만 분주히 움직였다. 작가로서 책을 내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일시에 모든 외부활동이 멈춰졌다.
고립(孤立, isolation)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홀로 있는 시간은 두 흐름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잃고 정신을 잃고 타인을 잃는 외로움(loneliness)의 선분을 타고 추락하거나, 자신과 함께 정신을 추스르고 내면을 탐색하는 고독(孤獨, solitude)의 선분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 나는 이 코로나의 시간에 고독의 선분을 타고 흐르기로 결심했다.
고독의 시간을 즐기기에 고전 읽기만큼 유익한 것은 없었다. 일 년 남짓 도서관에 있는 쪽방에 들어앉아 《장자》를 다시 읽었다. 내가 단골로 강의했던 책이라 수십 번도 더 읽었지만, 코로나 시기에 읽는 《장자》는 사뭇 달랐다. 거기에는 나의 모습뿐만 아니라 이웃의 모습, 우리 사회의 모습이 중첩되어 있었다. 대충 읽을 때는 알 것 같았던 대목도 깊이 읽으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나의 무지는 더욱 깊어 갔다.
후배 작가가 코로나 시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권장한 ‘브런치(brunch)’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하루하루 예배를 드리는 마음으로 묵상하고 글을 연재하였다. 글을 연재하며 글을 쓴다는 것은 아는 만큼 쓰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만큼 쓰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알아서 쓰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쓰는 것이다. 그 몰라서 쓴 글들이 모여 책 한 권 분량이 되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이 읽었던 《장자의 맛》이다.
장자와 보낸 한 해가 헛되지마는 않았다.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더욱 물음표를 많이 찍었지만, 장자의 마음 한 자락은 올라 탄 기분이다. 장자 역시 전국시대의 어려움 속에서 고립의 시간을 고독의 시간으로 바꾸며 글을 썼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지인과 제자 외에는 만나지 못했던 장자를 상상한다. 홀로 방에 틀어박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갔던 장자가 보인다. 거기서 만난 나비와 꽃들, 나무와 동물들, 전설 속의 사람이나 상상 속의 사람들이 장자의 글쓰기에 오롯이 쓰여있다.
영정조 시대 이덕무도 친구가 별로 없어 책이나 읽고 자신을 친구 삼아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지어진 호가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이고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 나를 친구 삼은 사람)’이다. 나 또한 코로나 시기에 책만 보고 나를 친구 삼아 글을 쓰고 살았다. 마냥 좋지마는 않았지만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책 한 권은 짓게 되었다. 이 나이에 성장이란 말이 조금은 우스워 보이지만 어쨌던 그만큼 성장했다.
코로나 사태는 물질문명의 성장과 정신문명의 쇠퇴의 앙상블이다. 인류는 초고속으로 물질문명을 쌓아갔지만 그만큼 빠른 속도로 정신문명을 상실했다. 그 결과가 코로나 사태이며 기후 재난 위기이다. 자연세계를 파괴하면서 이룩된 물질문명은 항상 위태하다. 과학은 나노 단위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해졌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작은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니 말이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 말마따나 과학혁명은 무지의 자각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난 후인 현대에도 우리는 무지를 절감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시 묻고 또 물어야만 하는 시간대에 살고 있다.
장자는 산과 같아 갈수록 높아지고, 물과 같아 갈수록 깊어진다. 아마도 내가 읽은 장자는 높은 산의 초입쯤 되어 보이고, 바다로 흐르는 시냇가의 한 언저리쯤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살아있는 한 나의 장자 읽기는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런 마음으로 나의 책을 읽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책으로 묶는 이유 역시 장자에게서 얻은 것이다. 만물은 평등하다는 생각. 존재의 크기나 위상과 관계 없이 모든 존재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 그래서 장자가 자신의 책을 두고 “잘 모르겠습니다. 다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나 역시 후세에 장자를 만나면 “잘 모르겠습니다. 다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알고 있는 장자라면 분명 씩 웃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연암 박지원의 멋진 문장으로 장자에게 답하리라.
“말똥구리는 제가 굴리는 말똥으로 사랑하므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기에게 여의주가 있다 하여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