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기억이 사라진 이름 없는 섬은 여러모로 우리의 현재를 닮았다. 오늘날 세계는 비워지고 정보에게 자리를 내준다. 정보는 저 몸 없는 목소리들과 마찬가지로 유령 같다.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사물화하고 탈신체화한다. (......)
정보는 사건인 척한다.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산다. 그러나 흥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새로운 흥분을 향한 욕구가 생긴다. 우리는 흥분을, 놀람을 목적으로 실재를 지각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은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
- 한병철, 《사물의 소멸》 서문 중에서
나이가 들면서 기억들이 점점 쉽게 사라진다. 책을 읽으면 기억나는 것보다 잊게 되는 것들이 더 많다. 자연스런 생물의 현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못내 아쉬운 것들도 있다. 가령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 같은 것들.
기억조차 믿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확인하고 대조해본 결과,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머니 것과 많이 다르다. 아마도 기억이라는 것은 각자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늘 새롭게 창조되고 구성되는 것인가보다.
사람들은 내부 기억을 떠올리기보다 새로운 바깥 정보를 흡수하는 일에 더 신경쓰지만, 자신의 고유한 정보 아닌 것에 시간을 많이 보내기보다는 자신 소중한 기억을 끊임 없이 새기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 기억과 생각의 파편들을 이어 붙이고 기록하는 것이 글쓰기이며 이야기하기다.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생이고 그 생에 붙어있는 기억이지만, 글로 새기고 말로 전해주면 어쩌면 생물학적 시간보다는 오래 유지될 수도 있다.
내 삶의 핵심어 세 가지를 말하자면, 공부와 철학과 글쓰기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생이 끝나기 전에 이 삼부작을 간략히 써서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는 하늘만이 아시겠지만, 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쓸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