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일기 29 : 정리
2023. 7. 29.
1.
어제, 31일 월요일 오후 1시 10분발 김포행 아시아나 항공편을 예약했다. 태풍이 몰아치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나는 이달 말일 고양시로 돌아간다. 7월 4일부터 7월 31일까지 근 한 달간의 가파도 한 달 살기가 마무리된다. 가파도 살기를 상상만 할 때는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에서 집필을 하거나, 작품구상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져가야 할 책도 집필과 관련된 책 3권, 그냥 편하게 읽을 책 2권, 총 5권만 가져갔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2권만 가져와도 될 걸 그랬다. 가파도에서 읽는 책은 김상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 이 2권이었다.) 책을 집필하기 위해 가져온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됐다.)
김상욱의 책이 인류문명 전체를 상상할 수 있는 과학책이었다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은 나의 작가 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베르베르의 책은 오늘 오전에야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냥 틈틈이 읽었더니 일주일이나 걸렸다.) 베르베르의 책을 읽으며 억지로 나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았다.
1) 그는 나와 나이가 비슷하다. 그는 61년생이고 나는 64년생이다. (물론 그가 형이다.)
2) 그는 나와 저술한 책의 숫자가 비슷하다. 그와 나는 30여 권의 책을 썼다. (물론 그는 35개 나라에서 그의 작품을 번역하고 3천만 권 이상의 책이 팔린 세계적 작가이다. 그에 비해 나는......)
3) 그의 최근 저작은 고양이와 무척 관련이 많다. (나는 현재 6명의 고양이 집사이다. 물론 이 임무는 모레로 끝나겠지만.)
베르베르는 예순 살. 그의 생애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바보 카드와 함께 다시 출발점에 섰다. 그것은 삶이라는 여정의 앞과 뒤에 위치하는 카드다. 모든 것을 이룬 지금, 나는 봇짐을 어깨에 메고 수시로 엉덩이를 할퀴어 나를 깨어 있게 해주는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난다."(469쪽)
아, 이 책이 베르베르 씨가 60살이 되어 자신의 작가생활을 회고하며 쓴 작품이었구나. 그는 자신이 어떻게 작품을 구상하고, 인물을 창조하고,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독자들(과 미래의 작가들)을 위해 말하고 싶었구나. 베르베르가 60살에 쓴 책을 60살이 된 내가 읽고 있었구나. 고양이와 길 떠나는 그와 고양이를 남겨두고 떠나는 나는 얼마나 가깝고 먼가.
나의 방학은 끝났다. 나도 다시 개학을 앞둔 학생처럼 밀린 숙제를 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계약한 책만 써도 올해가 모자랄 판이다. 올라가서는 부지런히 써야겠다. 부지런히 써서, 다시 부지런히 쉬자! 한 달간의 방학을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자. 몸도 챙기고, 마음도 챙겼다. 다시 살 힘을 축적했다. 이제 또 하루하루 뚜벅뚜벅 살아내 보자.
2.
냉장고 파먹기도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 만두도 다 먹었고, 국수도 거의 다 먹었다. 감자도 다 먹었고, 양파와 당근도 다 먹었다. 어묵도 다 먹었고, 빵과 잼도 거의 다 먹었다. 캔맥주도 오늘 저녁에 한 캔만 먹으면 끝이다. 돼지고기도 내일 아침 김치찌개를 끓이면 다 먹는다.
다 먹지 못할 것은 많이 요리해서 매표소 직원 식구에게 나눴다. 감자볶음, 된장찌개, 떡볶이, 카레를 많이 만들어 나눴다. 매표소 직원은 나에게 멍게비빔밥과 돼지국수를 사줬다. 내가 음식을 해서 남에게 나눠주는 일은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해서 나나 가족이 먹던 적은 몇 번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재미와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을 경험했던 가파도의 한 달이었다. (이런 기회를 마련해 주고 훌쩍 떠나버린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무모함이 아니었다면, 내 생애 결코 한 달 동안 혼자 살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떡볶이는 어묵을 듬뿍 넣고, 밀떡을 썼다. 고추장이 아닌 고춧가루 베이스로 만들었다.
오늘은 된장찌개와 카레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넣었다.
직원이 점심 때 사준 멍게비빔밥과 돼지국수. 돼지국수는 일품이다.3.
내일은 가파도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대청소를 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짐정리를 하고 편하게 휴식을 취할 것이다. 가파도 일기를 쓰게 될까? 모르겠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내일 마지막 일기를 쓸지는 내일 가봐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