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 쓸 수 없는 것에 대해 쓰기

2023.9.24.

by 김경윤

글빚을 갚기 위해 책상머리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켠다. 지난 시간 쓰다만 원고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는데 지난 원고가 낯설고 낡아 보인다. 마우스를 돌려 원고의 끝이 아니라 앞으로 달려간다.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앞의 원고들이 더 낯설고 어색하다. 내가 쓴 글인데 마치 남이 써 놓은 듯하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냥 지나쳐지질 않는다. 결국 내가 써놓은 원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젊었을 때는 쓸 원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었다. 글감에 비해 항상 쓸 시간이 모자라 밤을 새운 나날이 많았다. 글은 생각을 앞질러 달려갔다. 생각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글을 불렀다. 하루에 50매를 쓰고도 목말랐다. 하지만 이제는 글이 달리지 않고 기어간다. 문장을 겨우 세워놓으면 자꾸 절뚝거린다. 다음 문장 쓰기가 힘들다. 쓸 수 있는 시간보다 쓰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쓸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희망 없이 절망을 노래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내 속에 갇혀 웅얼대는 노래는 얼마나 무력한가. 나는 왜 쓰지 못하고 쓸 수 없는가.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 전망의 문제다. 고작 글이나 쓰면서 거짓을 생산할 수는 없다는 자의식이 나를 자주 멈추게 한다.


차라리 책상물림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투박한 이 몸으로 소박한 기술을 익혀 평범하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어린 시절, 고립과 가난은 나를 책 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가난해도 책을 읽으면 잠시라도 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책 속의 삶은 무궁했고 생각들은 무진했다. 책으로 살 수 있다면 근심걱정에서, 소박하게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책 속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었고, 책 속의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흉내를 낸 것일까? 마치 연기를 하듯 살아온 것일까? 이제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을만치 먹었으면 세월의 더께를 갑옷 삼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요즘 나는 나를 감싸는 이 더께가 불편하다. 중간중간 구멍이 숭숭 뚫려 을씨년스럽고, 누덕누덕 기운 틈들이 벌어져 창피하다. 이 더께 속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


아직 모국어가 익숙하지 않았을 아이, 어른들의 말들이 성숙과는 멀어 낯설게 느껴졌던 그 아이가, 겨우겨우 책 속 말들을 배우며 이만큼 살았는데, 때로 개나리색 문장으로 풋사랑을 노래하고, 때로 선홍빛 핏빛으로 세상을 물들이며, 회색빛 벽들을 세워 낯선 이를 막아내고, 흔들리는 모닥불을 피워 온기를 유지했는데, 꽃은 지고, 피는 굳고, 벽은 무너지고, 모닥불은 꺼졌다. 다시 꽃이 필까? 담장이라도 세우고 불씨라도 살릴 수 있을까?


글 쓰지 못하는 이유와 심정을 톺아보는 이 글은 왜 이리 잘 써지는 것일까? 글 쓸 궁리는 하지 않고 글을 쓰지 못하는 변명만 해대는 이 이율배반적인 글쓰기가 이리도 수월하다면, 차라리 '나는 왜 글을 못 쓰는가'라는 제목으로 잔뜩 글을 쓴 후, 출간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그만'하고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나를 조롱한다. 어여 생활로 돌아가라고 나를 부추긴다. 암만. 알았다고 쓰면 되지 않냐고 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눈을 흘긴다. 참 어수선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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