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을 달린다 5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최인훈 전집 4권

by 김경윤

예술가와 과학자의 말이, 그것만이 정말이다. 왜 그런가. 그들이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어서 그런가. 아니다. 예술이라는, 과학이라는, 신(神)대를 잡으면 본의 아니게 정말을 실토하게 된다. 신들린 무당처럼, 용한 무당도 술 먹고, 오입하고 사기도 한다. 그러나 신대를 쥐고 몸을 와드드 떠는 당장에만은 정말을 중얼거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그게 직업의 허영이다. 신들린 말을 녹음한 기계 — 그것인즉 바로 책이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정말의 기록으로서는 아직 책보다 나은 게 없다. 책 속에서는 저자는 자기한테 불리한 말도 한다. 번연히 제 눈 찌르는 말도 한다. 그러지 않고는 말이 씨가 먹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 별것이 아니다. (164쪽)



이번에도 최인훈은 자신 고유의 소설 제목을 쓰지 않고,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소설가 박태원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원용해 쓰고 있다. 벌써 3번째다. 〈구운몽〉 《서유기》에 이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까지. 여기서 멈출까? 아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많은 작품들이 다른 작가의 작품명을 그대로 끌어다쓰고 있다. <열하일기>(1962년), <크리스마스 캐럴>(1963년), <금오신화>(1963년), <놀부뎐>(1966년), <춘향뎐>(1967년), <옹고집뎐>(1969년), <태풍>(1973년) 등이 고전작품의 제목을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쓴 사례이다.


이 중에서 외국작품을 끌어다 쓴 것은 《서유기》, <크리스마스 캐럴>, <태풍>등이다. <태풍>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의 제목(1907년)이기도 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tempest>(1611년)의 제목이기도 하다. 누구의 것을 빌려온 것일까?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다른 사람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존경의 마음을 담은 일종의 헌정(獻呈)의 행위일 수도 있고, 패러디일 수도 있고, 확장과 변형일 수도 있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은 월북작가였다. 박태원의 소설을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쓴 것은 일종의 금기를 깬 용기였다. 당시는 엄혹한 군사독재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최인훈은 박태원의 소설 정신을 확장하여 박태원이 1930년대 하루의 풍경으로 그려낸 경성의 모습을 1970년대 1년 이상으로 확장하였다. 게다가 단순확장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와 예술과 종교의 계보학적 접근을 소설적으로 풀어 “작가란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써야 하는가?” 등 작가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삶의 근본문제를 치열하게 묻고 있다.


나는 15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이며 철학적 에세이를 읽으며 처음으로 가슴 깊이 울었다. 아, 최인훈이란 작가는 참으로 외롭고 힘들었겠구나. 주류에 속하지 않는 자유인으로 남아서 소시민적 삶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동굴에 갇혀 있으면서도, 입구를 가로막는 엄청난 바위를 알고 있으면서도 용기를 내어 출구를 탐문하고 문학적으로 돌파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작가가 있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 시대에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그 근원을 파헤쳐 세계적 안목으로 돌파하려 했던 문학적 시도가 있었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고작 이 정도의 시대적 상황에서도 무력감에 사로잡힌 나는 도대체 무슨 작가란 말인가. 이런 질문들을 책을 읽고 있는 도중에 묻고, 울고, 또 묻고 울었다.

자신의 지루한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묵묵히 일상을 감당하면서 글쓰기를 통하여 용기있게, 치열하게 희망을 찾아가는 최인훈 작가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평범 속에 묻어 있는 이 거대한 작품을 직접 읽어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나의 오늘은 축복된 날이다. 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


앞의 인용구는 제6장 ‘마음이여 야무져다오’라는 소제목으로 연재한 글에 나오는 부분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요즘, 나의 글쓰기를 반성하고, 작가란 무엇인가. 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들이라 인용하였다.


<보너스>

박태원이 당시 소설을 연재할 때, 이상이 삽화를 그렸다는 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박태원과 이상이라. 참으로 예술세계는 놀랍지 않은가?

<보충>

이 연재소설을 쓴 작가의 마음-문학사적 연속성의 확보-을 읽고 싶다면 <화두 2>의 52쪽~57쪽을 읽어보라. 최인훈 작가가 얼마나 박태원과 자신을 연속성의 시선에서 보고 싶은지 절절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56~57쪽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다.

"문학사의 연속성이라는 것은 선후 작품들 사이에서 부르고, 받고, 그렇게 대화하는 관계 -- 하나하나의 문학작품들이 등장인물이 된 드라마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문학사' 전체가 끝날 줄 모르는 열린 미완의 작품이라는 생각, '미완'이란 말은 결코 소극적 의미가 아닌, 진화론적 열림의 뜻으로 그렇게 부르고 싶다는 것. 문학사에서의 한 시대의 모습은 다음 시대에서 메타모르포시스되는 것이라는 생각. 문학사를 채우는 작품들은 다음 시대의 다른 작품으로 메타모르포시스된다는 생각. 문학사는 자기 사신을 프로테우스Proteus처럼 한없이 변모시켜가는 푸가fuga 같다는 생각, 선행 후행하는 작품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알아보고, 시간과 배경을 건너뛰면서 부르고 화답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환상의 생태계라는 생각, 시대의 저편에서 부르는 소리. 시대의 저편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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