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전집 3권
《서유기》의 사상은 깊다. 손오공을 다루지 못해서 부처들에게 응원을 청하려 가는 마귀들은 극락의 연못에 있던 고기이기도 하고, 말이기도 하고, 기르는 새이기도 하고, 고양이이기도 하고, 오래 가까이 두고 쓰던 기물이기도 하는 그 이야기에는 가장 깊은 사상이 있다.
그것은 3년 서당살이에 풍월을 읊게 된 서당 개들의 이야기다. 생명 없는 물건이, 혹은 제 분수를 넘는 동물들이 부처의 뜰에서 도망쳐 나와 소동을 피운 끝에 부처의 호통 한마디로 쥐구멍 찾듯 본모습을 드러낸다는 그 이야기는 훌륭한 자연철학이며, 논리학이며 신학(神學)이다. 목숨 없는 물건이 자기 환상(幻想) 속에서 ‘나’를 참칭(僭稱)하고 부처의 뜰을 벗어나 헤맨 끝에 부처의 노여움, 혹은 부르심으로 깨어 본래의 자리에 돌아간다는 것은 그대로 기독교의 창조, 죄, 구원의 이야기가 아닌가. 《서유기》는 위대한 책이다. (261~262쪽)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난해하기로 유명한 대표작 《율리시스》를 써서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고대 시인 호메로스가 쓴 《오뒷세이아》의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이 ‘율리시스’다. 그렇다고 제임스 조이스가 《오뒷세이아》를 새롭게 쓴 것은 아니었다. 1000쪽에 가까운 (정확히 기록하면 960쪽) 이 소설은 1904년 6월 16일 더블린 시를 배경으로 주인공 스티븐 데덜러스(조이스가 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 데덜러스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의 영국식 표기다.)와 새로운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와 아내 몰리 블룸의 하루 일과를 다루고 있다. 분량에 비해 다루는 시간이 과하게 짧다. 하지만 이는 약과다. 최인훈의 《서유기》는 주인공 독고준이 이유정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환상여행을 350여 쪽에 걸쳐 다루고 있다. 《율리시스》의 작법으로 ‘의식의 흐름’이 유명하다면, 《서유기》는 아예 의식을 넘어서 ‘환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간다.
물론 최인훈의 《서유기》는 중국 명나라 때 오승은이 쓴 판타지소설 《서유기》와 제목이 같을 뿐, 본문 안에 손오공이나 삼장법사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논개, 이순신, 이광수, 조봉암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주인공과 만난다. 시공간은 뒤틀리고, 상황은 급반전되고, 인물들이 교체되고 증식된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중층적이고 난해하다. 재미를 생각하고 이 책을 들었다면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하고 책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최인훈 작가의 역사적, 철학적, 사회문화적, 정신적 탐구를 소설을 통해서 하고 싶다면 《서유기》를 읽어보시라.
새벽 2시, 애인(?)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체포되어 거미줄이 쳐진 어두운 복도를 지나 쇠고랑을 차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다면, 암울한 우리의 역사와 그 역사를 대면하는 주인공 독고준의 뇌 속을 탐험하고 싶다면, 독고준(최인훈의 분신)의 어린 시절 W시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카프카의 <변신>처럼 갑자기 도마뱀으로 변신하여 가족을 대면하는 작가의 심리상태를 탐험하고 싶다면, 《서유기》를 읽으면 된다. 유럽에 제임스 조이스와 카프카가 있다면, 한국에는 최인훈이 있다.
아참, 연재하며 사랑에 대해서 계속 언급했는데, 이 책에도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독고준은 자신을 기다리며 감옥 속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며 3백 년이나 기다려온 논개와 결혼해야 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독고준은 논개와 결혼해야 감옥에서 논개가 석방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결혼을 거부한다. 참 융통성이라고는 일도 없는 주인공이다.) 그리고 《회색인》의 후속작답게 어린 시절 방공호에서 폭격을 피해 살을 맞대고 있었던 여인의 이야기도 잠시 등장한다.
하지만, 사랑의 대목을 인용했던 기존의 관습을 깨고, 이번에는 본문에서 《서유기》를 평가한 대목을 앞에 인용했다. 원작 《서유기》가 환상 소설이듯이, 최인훈의 《서유기》 또한 환상소설이기에. 그래서 작가가 왜 ‘서유기’라는 제목을 굳이 붙였을까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