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전집 2권
그때 부드러운 팔이 그의 몸을 강하게 안았다. 그의 뺨에 와 닿는 뜨거운 뺨을 느꼈다. 준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숨이 막혔다. 살냄새, 멀어졌던 폭음이 다시 들려왔다. 준의 고막에 그 소리는 어렴풋했다. 뺨에 닿는 뜨거운 살. 그의 몸을 끌어안은 팔의 힘. 가슴과 어깨로 밀려드는 뭉클한 감촉이 그를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지게 만들었다. 폭격은 계속되었다. 폭탄이 떨어져오는 그 쏴 소리와 쿵, 하는 지동 소리는 한결 더한 것 같았다. 준은 금방 까무러칠 듯한 정신 속에서 점점 심해가는 폭음과 그럴수록 그의 몸을덮어누르는 따뜻한 살의 압력 속에서 허덕였다. 폭음, 더운 공기. 더운 뺨. 더운 살. 폭음. 갑자기 아주 가까이에서 땅이 울렸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웅성거렸다. 폭음. 또 한번 굴이 울렸다. 아우성 소리. 폭음, 살냄새…… (62쪽)
《회색인》은 월간지 <세대>에 1963년 6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구운몽>의 주인공이 독고민(獨孤民)이라면 《회색인》의 주인공은 독고준(獨孤俊)이다. 성씨를 빼고 이름만으로 대별하면 평범함 백성[民]이 빼어난[俊] 지식인으로 바뀌었다. <광장>과 비교해 보자면, <광장>의 이명준이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행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식인이라면, 《회색인》의 독고준은 북한에 어머니와 누이를 남겨 두고, 아버지와 함께 월남하였다가 아버지가 타계하여 남한에 홀로 남게 된 고독하고 관념적인 지식인이다.
《회색인》의 원제는 <회색의 의자>였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그 “깊은 회의와 권태의 의자”에서 어느 것 하나 선뜻 선택하지 못하고 늘 사색하고 탐문하고 성찰하면서 살아간다. <광장>에서의 사색과 성찰이 이명준이 홀로 행했던 솔로 연주였다면, 《회색인》에서의 그것은 독고준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 김학, 황선생, 오승은, 김소위 등과 함께 나누는 앙상블 연주이다. 그러니까 이전 작품보다 사색의 주제와 범위가 넓어지고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하여 깊이를 더하는 철학적 관념 소설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갈등과 서사 중심의 당대 소설들에서는 볼 수 없는 철학적 에세이 중심의 소설의 등장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주제는 혁명, 문명, 종교, 에고, 예술, 구원, 가족, 민족, 국가…….
사랑은 없나? 사랑에 대한 다양한 관념적 탐색뿐만 아니라 실제 등장하는 사랑이 있다. 소설 속에 매력적인 여성 둘이 등장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순임과 자유분방한 예술혼을 가진 이유정. 독고준은 이 둘(슈퍼에고/이드, 종교/예술 등등으로 치환될 수 있는) 사이에서 결국 이유정을 선택한다. 소설의 끝에서 독고준은 이유정의 방으로 들어간다. (놀라운 일은 최인훈의 다음 소설 《서유기》가 바로 이유정 방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독고준에게는 이보다 더 원초적인 성체험이 있었다. 어린 시절 폭격으로 방공호에 대피해서 겪었던 죽음과 같은 에로스의 경험. 위의 인용구가 바로 그 장면이다. 우리는 누구나 원(原)체험을 가지고 있다. 원체험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첫 경험이라 하자. 너무도 강렬하여 평생 기억되고 변형되며 확장되고 각인되는 그 첫 경험 말이다. 그 원체험이 삶의 근원에서 항상 삶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주인공 독고준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했던, 죽음(타나토스)와 사랑(에로스)을 동시에 경험한 것이다. 이 기억이 끊임없이 소설에서도 소환되어 소설의 배음(背音)이 되고 있다. 아, 사랑! 깊도고 멀구나.
<추신>
최인훈이라고 작가론이라 말할 수 있는 구절이 소설 속에 있어 인용해둔다.
“보편과 에고의 황홀한 일치, 그것만이 구원이다. 어떠한 이름 아래서도 에고의 포기를 거부하는 것. 현대 사회에서 해체되어가는 에고를 구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는 작가의 임무일 것이다.”(2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