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을 달린다 2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권

by 김경윤

여자가 남자의 옆모습에 눈을 주며 입을 연다.

“민!”

“......”

이쪽은 말이 없이 눈으로 대답.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랑했을까?”

남자는 그 물음에도 여전히 대답이 없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여자도 선다. 남자가 두 손으로 여자의 팔을 잡는다.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신기한 보물을 유심히 사랑스럽게 즐기듯.

깡통. 말이라고 해? 끔찍한 소릴? 부지런히 사랑했을 거야. 미치도록. 그밖에 뭘 할 수 있었겠어.”

남자는 잡고 있던 여자의 겨드랑 밑으로 팔을 넣어, 등판으로 거슬러올라가서, 두 손바닥으로 여자의 부드러운 뒤통수를 꼭 붙들어서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입을 맞춘다. 오랫동안.

하늘에는 꽃불. 땅에는 훈풍과 아름다운 가락. 플라타너스 잔가지가 간들간들 흔들린다. 잎사귀가 사르르 손바닥을 비빈다.

그들의 입맞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49~350쪽)






<광장>이 4.19 민주주의 혁명의 자식이라면, <구운몽>은 5.16 군사 쿠데타의 자식이었다. 4.19 혁명이 이승만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의 지평을 잠시 열어주었던 역사적 사건이라면, 5.16 군사 쿠데타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싹을 잘라버리고 장기적 군사독재의 길을 연 반동적 사건이었다. <구운몽>은 암흑의 시대를 반영하는 최인훈의 대표작이다.

제목부터 희한하다. <구운몽>은 조선 후기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해 창작했다는 한글소설이다. 성진이라는 불제자가 꿈속에서 양소유가 되어 8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부귀영화를 맛보다가 깨어나, 삶이 모두 일장춘몽(一場春夢)을 깨닫고 불법에 귀의하는 내용이다.

이미 있는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빌려 쓰는 것은 의도가 있을 텐데, 최인훈의 <구운몽>(1962년작)은 원작의 현실-꿈-현실의 구조를 차용하되, 원작을 비틀어 비판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 (이런 사례는 중국고사를 비틀어 비판했던 루쉰의 《고사신편(故事新編)》이 있다.) 그는 그 구조를 이용하여 암혹한 시절에 방황하는 청년의 비극적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 속에 주인공은 독고민(獨孤民)이다. 이름 속에 이미 주인공이 ‘고독’에 빠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홀로[獨] 살아가는 외로운[孤] 백성[民]’. 민은 뒤늦게 도착한 편지를 통해 한때 사랑했으나 자신을 버리고 사라져 버린 첫사랑의 여자 – 왼쪽 뺨에 있는 까만 점이 특징인 – 숙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 숙을 만나기 위한 여정 속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문제는 이 숙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 현실이 아니라 꿈 속이라는 점. 그리고 꿈속에서 민은 다양한 역할로 변형된다. 시인, 은행장, 춤선생, 각하(박사), 혁명군의 수괴가 된다. 꿈속에서는 그런 역할이 설정되었으나 민은 꿈속에서도 계속 자신의 역할을 부정하고 도주한다. 마지막에는 혁명군의 수괴가 되어 겨울 광장의 얼어붙은 분수대에서 정부군의 총격에 살해되고 만다. (나중에 방탄조끼를 입은 민은 다시 일어나 혁명동지들(꿈속의 등장인물들)과 만나고 망명을 떠난다.) 현실에서는 변변치 않은 조그만 간판 가게에서 그림을 그리는 직공에 불과하지만, 꿈속에서는 성공한(?) 역할이 부여됨에도 민은 모두 이 지위와 역할을 부인하고 숙이를 찾아 도주한다. 문단의 명예도, 경제적 성공도, 예술적 성취도, 정치적 혁명도 첫사랑을 만나는 것보다 무가치한 것이라는 듯. 그러나 꿈속에서 만난 숙이는 이미 그를 잊었고, 민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은 현실에서도 실패하고, 꿈속에서도 실패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이튿날 아침) 후반부에 뇌를 연구하는 신경외과 의사 김용길 박사가 등장하고 제7병동 앞 벤치에 앉아서 동사(凍死)한 독고민을 발견된다. (......) “비둘기는, 시계탑 꼭대기를 발톱으로 걷어차고 푸드덕 날아오른다. 햇빛이 가득한 하늘로 높이높이 아스라이 솟아, 올라간다.”(343쪽)로 끝났으면 딱 좋았을 이 소설은, 이후로 고고학 인문 시리즈류의 영화감상관이 나오고, 성탄절(음력 4월 초파일) 기념 초대 시사회 격인 그 영화를 보고 나오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추가하며 끝을 맺는다. 위의 인용한 부분이 바로 영화를 감상하고 나오는 연인들의 대사와 행동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그 무엇보다 첫사랑을 갈망했으나 결국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주인공 독고민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부지런히 사랑했을 거야. 미치도록. 그밖에 뭘 할 수 있었겠어.”라고 말하는 남자(그의 이름도 민)의 진술은 묘한 울림으로 남는다. 마지막 키스신과 함께.


<추신>

최인훈은 소설 속에서 자신의 분신과 같은 독고민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죄명은 ‘풍문인(風聞人).’ 그는 인생을 살지 않았으며 살았으되 마치 풍문 듣듯 산 것임. 즉 흉악범(凶惡犯)”(295쪽)

아마도 5.16 이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선고인 것 같아, 따로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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