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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Oct 20. 2020

감히 샘 오취리를 변호합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는 인종차별 이슈


살다 보면 내 생각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 '부먹'이냐 '찍먹'이냐, '짜장'이냐' '짬뽕'이냐와 같은 사소함부터 정치적 판단까지 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 이게 진정한 나의 의사표현인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의견은 개인의 자유지만, 다수의 여론이 한쪽 방향으로 흘러갈 때 거기에 저항해서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다들 피자를 시키려 할 때 내가 치킨을 고집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또다시 의사결정 과정을 번복해야 하는 게 싫거나 주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서다. 모두가 특정 인물을 비난할 때 내가 굳이 그를 옹호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주장이니까 내 의견보다 옳을지 모른다는 흔들림, 그리고 나까지 도맷금으로 욕받이가 될지 모르다는 불안감. 대개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게 안전한 이유는, 설령 그 생각이 틀렸다 할지라도 그 잘못이 1/n만큼 희석되는 분산 효과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나 혼자 'no'를 외쳤을 때는 그 후폭풍이 n 수만큼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에 한 마디를 하고 싶다. 바로 방송인 샘 오취리에 관한 일련의 사태 말이다. 최근 코로나 사태와 맞물려 가장 이슈가 되었던 인터넷 밈은 아프리카 가나 장례업체의 관짝 춤이다. 이 춤을 둘러싸고 인종 차별 이슈가 생겨났다.


이 관짝 춤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최근에 한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흑인 얼굴 분장을 한 고등학생들이 관을 든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에 대해 '가나' 출신 '샘 오취리'가 이런 흑인 분장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며 이런 종류의 코스프레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에 대해 분노하고 샘 오취리의 과거 행적(방송, sns 활동)을 들추며 그의 내로남불을 깠다. 그 결과 샘 오취리는 방송활동에 타격을 받았고, 한동안 여파는 지속될 것이다.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샘 오취리의 이중성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이는 본질과 약간 거리가 있으며 서로 논쟁을 하자면 끝이 없는 무한루프와 같은 소재이다.


원래 블랙페이스는 미국처럼 백인과 흑인이 섞여 사는 사회에서는 상당히 민감한 이슈라고 알고 있다. 백인 코미디언들이 흑인을 조롱하고 농담거리로 삼기 위해 과도한 흑인 분장을 했던 것이 시초다.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 흑인들의 관점에서는 '블랙페이스' 분장을 보면 보면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인종 차별적 배경을 몸소 느껴본 적 없는 우리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의 반응이 낯설다. 그래서 '비하 의도조차 없는 단순한 코스프레다, 저 정도는 단지 검은 칠을 한 것이며 전형적인 블랙페이스와는 결이 다르다' 등의 반응이 나온다. 우리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다.

 

종교나 도덕적인 가르침을 따르자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폭넓은 대화를 하자' 정도로 끝났을 이슈가 이렇게 커진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 그의 행적이 까발려지는 세태로 옮겨 가보자. 그는 방송에서 '째진 눈' 모양을 취했고, 한 여자 연예인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는 음담패설형 댓글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게 '지금' 문제가 되었다.


위 장면은 모두 방송이나 sns에 있기 때문에 대중에게 그 당시에도 노출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대중은 여기에 문제제기를 안 했다는 상황을 지적한다.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것인데, 나 같은 경우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겪어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인종적인 문제를 겪어보기는 어렵다. '눈 찢기'가 동양인을 비하하는 제스처라는 건 알지만, 실제로 체험해 본 적은 없기에 덜 민감하다.


나는 미국을 3달 동안 여행하면서도 겪어본 적은 없다. 왜냐하면 현지인에게 여행자는 말 그대로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곧 떠날 사람에게 환대를 하면 했지 경계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방인이 '우리'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려고 할 때이다. 미국에서 신학생으로 몇 년째 거주하는 친척형은 이렇게 말했다. "여행할 때는 별 문제가 없어. 근데 여기 살려고 하니까 좀 안 좋게 보더라고." 미국에 사는 동양인에게는 '눈 찢기'가 민감한 인종 차별 이슈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한국 사람에게는 약간 결이 다를 수 있다.


샘 오취리의 행동이 옳았다 그르다를 논하는 게 아니다. 고등학생들의 코스프레 중 '블랙페이스'에 대해서 샘 오취리는 민감했으나, 샘 오취리의 여러 행동들에 대해서 우리는 민감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결론을 말하려고 한다. 문제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문제가 아니었던 샘 오취리의 행동이 문제가 된 것은 그 행동이 옳다 그르다의 판단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우리의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샘 오취리에 관한 기사에서 이런 종류의 비판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돈 벌어놓고는 저딴 소리나 하다니. 니네 나라로 꺼져."


우리는 대한 외국인들에게 어떠한 프로토타입을 규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을 좋게 얘기할 때는 참으로 '좋은 외국인'이지만 귀에 거슬릴 때는 '참 나쁜 외국인'이 되어버린다. 외국 영화배우가 영화 홍보차 한국에 와서 '한국이 제일 좋아요. 한국 비빔밥 맛있어요" 같이 입에 발린 드립을 하면, 진정성이 없음에도 우리는 좋아한다. 샘 오취리가 우리의 역린을 건드리는 멘트를 날렸을 때 그는 더 이상 '우리의 샘'이 아니게 되었다. 과거에 별생각 없이 넘어갔던 그의 행동들은 이제 좋은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듣기 싫은 소리는 말 그대로 싫다. 나도 그렇다. 허나, 나는 대한 외국인이 우리가 바라는 모습(한국을 칭찬하는 착한 외국인)을 보이지 않았다며 과거를 들춰가며 매장시키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들이 진정 한국을 위한 쓴소리는 못 하고 '진정성 없이' 입에 발린 드립만 하게 될까 봐 두렵다. 그게 당신이 바라는 바인가?


왜 우리는 이렇게 쉽게 분노하는가? 거악 앞에서는 조용하면서 이런 자그마한 일에는 분노하는가? 분노란 지속력이 약해서, 작은 것에 분노하면 정작 필요할 때는 분노할 수 없다. 나는 당신들에게 김수영의 시 한 편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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