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강대국의 조건]이라는 책을 읽었다.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몽골 제국. 그들의 개방성과 관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듣고 놀랐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행복해하면 된다는 신념에 따라 제국의 백성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 기독교도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이슬람교도들의 집단 거주지를 지나간다. 반대로 이슬람교도들이 코란을 암송하면서 기독교도들의 집단 거주지를 지나간다. 하지만 아무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 21세기인 지금도 가능할까 싶은 광경이다.
몽골 제국은 외국의 기술자들을 존중하고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그 결과, 외국의 발달된 선진 문화 및 군사기술이 몽골에게 전수되었고, 이는 안 그래도 강력한 기마민족의 군사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몽골의 군사 작전에 참여해던 외국인들은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지분 참여자로서 동참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비춰보기 위해서 800년 전 나라 이야기를 잠시 꺼내보았다. 2021년 4월 현재 내가 속한 지구촌에는 몇 가지 암울한 소식이 있다. 미얀마에서는 살인집단(한국에 난민으로 와 있는 미얀마 민주주의 민족동맹(NLD) 한국지부장 '얀 나이툰'은 그들은 '군부' 또는 '군사정권'이라 부르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이 시위대를 그야말로 난도질하고 있다. 미얀마 시위대가 UN에 보호책임(R2P)을 신청했으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중국, 러시아의 반대로(기권이었으면 파견 가능) 국제 사회의 행동은 기대할 수 없다. 그 사이 살인자들은 강간, 폭행, 살인, 시체 유기를 일삼고 있다.
미국에서는 증오범죄가 일어나 아시아인들을 위협하고 있다. 애틀랜타에서는 총격사건이 일어나 동양인 여성 6명을 포함해 8명이 죽었다. 아시안인들의 통행이 잦은 뉴욕 플러싱 거리에서는 증오범죄를 막기 위해 아시아인들이 만든 순찰대가 거리를 비장하게 지킨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과잉 진압하는 모습은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유독 약자에게 선택적 분노를 일으키는 자들이 많다.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하자면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약자 중의 약자인 아기를 아무 죄책감 없이 죽인다. 묶어놓고 때려죽인다. 내장이 파열될 정도로 발로 찬다. 엄동설한에 기저귀만 입힌 채로 밖에 버려 얼려 죽인다. 우는 애를 가둬놓고 굶겨 죽인다. 가방 속에 집어넣고 질식시킨다.
타자를 치다가 눈이 아득해와서 잠시 숨을 고른다. 평소와 달리 손놀림이 경쾌하지가 않다. 예전에 노엄 촘스키의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서 슬프고 무서운 대목을 읽은 이후 이런 감정은 오랜만이다. 그 대목은 미국이 중남미에서 저질렀던 만행 중 하나를 열거한 것인데 '엘살바도르에서 한 농부 여인이 집에 귀가했더니 아이들의 목이 잘린 채로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는 내용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때 느꼈는데, 내 옆에 있는 이웃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 새삼 충격이다.
2018년 부산에서는 연인과 헤어진 남자가 전 여자 친구 집에 들어가 귀가하는 가족을 한 명씩 차례대로 죽였다. 그리고 3년 뒤 서울에서 스토킹 범죄자가 해당 여성의 집에 들어가 여동생을 죽이고, 귀가하는 엄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당 여성을 죽였다. 판박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일이 또 일어나도 어쩔 수 없으리란 점이다. 스토킹 처벌법은 통과되었으나 반의사불벌죄라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운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거나 합의할 수도 있다.
인류는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인권과 자유 운운하던 강대국들이 정작 미얀마의 피눈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남을 믿지 못하는 각자도생의 시대. 일개 소시민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과연 그들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가? 아픔을 덜어줄 수는 없더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자그마한 방법이라도 제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