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멀티탭 화재 /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어릴 적 여름방학, 할머니 댁에 가면 늘 ‘선풍기 한 대’로 온 집안이 버텼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시원한 바람은 기다려야 더 귀한 거야" 하시던 할머니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나는 늘 ‘에어컨’이 간절했다. 시간이 흘러, 내 방엔 최신형 벽걸이 에어컨이 있고, 손 뻗으면 멀티탭이 늘어져 있다. 이제야 알겠다. 시원함은 기술이지만, 안전은 습관이라는 걸.
며칠 전이었다. 회사 동료 지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출근했다. 전날 새벽, 본가에 작은 화재가 났다는 것이다. 다행히 부모님은 무사하셨지만, 원인은 에어컨을 꽂은 멀티탭이었다. 순간 전력이 몰리면서 발열이 시작됐고, 불이 번지기까지 단 10분. "멀티탭이 이렇게 위험할 줄 몰랐어"라는 말이 무겁게 남았다.
에어컨 멀티탭 화재 / 출처 : 부산소방재난본부
사실 우리도 자주 그랬다. 벽면 콘센트가 멀리 있을 땐 당연하단 듯 멀티탭을 꺼내들었다. 침대 옆에 하나, 책상 밑에 하나, 주방엔 두 개. 그리고 그 위엔 늘 에어컨, 커피포트, 전자레인지, 그리고 드라이기가 함께 꽂혀 있었다.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위험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에어컨처럼 전력 소모가 큰 기기는 무조건 벽 콘센트에 ‘직결’해야 한다고. 멀티탭의 정격 용량은 보통 2500~2800W지만, 에어컨은 순간적으로 3000W 이상을 잡아먹는다. 불꽃은 우리가 보는 순간에 피어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전선 속에서 서서히 열을 키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에어컨 벽면 콘센트 /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물론, 멀티탭을 아예 쓰지 말라는 건 아니다. 정격전류 16A 이상, 4000W 이상의 고용량, 개별 스위치와 누전 차단 기능이 있는 멀티탭, 이것들을 선택하면 조금은 덜 위험하다. 다만, 문어발식 연결은 절대 금물. 멀티탭에 멀티탭을 또 연결하면, 그건 ‘전기 폭탄’을 조립하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말로 지켜야 할 건 시원한 바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바람을 피워내는 ‘환경’이다. 먼지 낀 멀티탭 하나가 여름 한 철을 눈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낡은 콘센트가 사실 더 안전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오늘 아침, 거실 콘센트에 꽂힌 멀티탭을 뺐다. 그리고 에어컨 플러그를 직접 꽂았다.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기분이 꽤 묘했다. 마치 가족의 여름을 지켜낸 느낌이랄까.
여름은 더워야 여름이지만, 그 열기 속에 불꽃은 없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