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Dec 30. 2023

가습기로움

포근하고 촉촉한 연말이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 중 기초학습 보충 지도 장소로 쓰일 우리 교실을 겉보기에 단정하게 청소했다. 내 책상 위 물건도 감출 건 감추고 버릴 건 버렸다. 집으로 가져와야 할 살림도 있다. 물건을 담을 튼튼한 쇼핑백 준비는 필수다.


왓츠 인 마이 쇼핑백?


머그컵과 텀블러를 넣었다. 제자에게 스승의 날 선물로 받은 10년도 넘은 머그컵. 김영란법은 2016년도에 생겼다니 불법은 아니... 었다고 말하고 싶다. 용돈을 모아서 샀다는 말에 '선생님은 이런 거 받을 수 없다'고 돌려주기도 미안했다. 지금까지도 감사히 쓰고 있다. 그 어린이는 잘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겠다. 심플하게 만들어진 컵을 볼 때마다 잘 생긴 수줍은 어린이가 떠오른다.  


핑크색 작업복(?) 조끼도 백 년 만에 세탁인가? 겨울 교실에선 출퇴근용 코트를 벗고 작업복 조끼를 걸친다. 작업복은 핑크색이 딱이다. 핑크색을 몸에 걸치면 기분이 말랑말랑 해진다. 흰색과 다르게 때가 잘 타지 않는 장점이 있다. 때가 조금 묻어 인디핑크가 된 느낌도 나쁘지 않다.  


건조한 사막 같은 인간에게 습기를 깨뿌려주던 소형 가습기도 챙긴다. 학교에서 대충 씻고 엎어둘까 잠시 고민했다. 부담 없는 사이즈니 집에 가져가서 마음에 들게 씻어 빠닥빠닥 말려 오기로 한다.


추위도 막고 멋도 부린다며 쓸데없이 걸쳤던 방울 달린 숄도 쇼핑백에 넣었다. 이건 다시 학교로 가져오지 않을 생각이다. 학교에서 숄이 웬 말이냐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1. 칠판에 글을 쓸 때 팔을 들어 올리기가 불편하다.

2. 흘러내리는 숄을 한 손으로 혹은 겨드랑이로 꽉 쥐고 있으려면 수업 끝에는 담이 찾아온다.

3. 어린이들이 숄 끝에 달린 방울 만져봐도 되는지 묻는다. 또 묻는다. 계속 묻는다. "안됩니다."


의자에 앉을 때 엉덩이에 깔린 줄 모르고 흘러내린 숄을 어깨에 올려 걸치려다 방울도 하나 빠진 상태. 집 근처 명장님께 찾아가 수선을 맡겨야 한다. 간단한 바느질은 나도 할 수 있지만, 숄에 달린 방울은 아무리 봐도 어디에 바늘을 넣어 어떤 루트로 빼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난이도 별 4개. 고도의 스킬이 필요하다.


퇴근해서 쇼핑백 물건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다. 인디핑크가 된 작업복은 세탁기에, 텀블러와 머그컵, 가습기 물탱크는 식기세척기에. 가습기 필터와 필터를 끼워 넣는 플라스틱 캡은 따로 빼 테이블 위에 널어 말린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예상치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강아지 하루가 태연하게 가습기 필터 캡을 씹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널린 많은 물건 중에 왜 하필. 필터라면 새것으로 교체하면 되는데, 따로 팔지도 않는 플라스틱 필터 캡을 픽하다니. 너란 개는 정말. 그간 카드지갑, 샌들, 소파 다리, 피아노 다리,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까지 많이도 해 드셨다. 개취(향)의 스펙트럼이 실로 방대하다.


엄마가 사 온 개껌이 너무 딱딱하다. 씹고 나니 피곤이 밀려온다개.



가습기를 구입한 홈페이지에서는 필터 이외의 부품을 따로 팔지 않는다. 사이즈도 딱 적당하고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디자인도 맘에 들어서 애정하는 물건인데... 그냥 학교에 둘걸. 뒤늦은 후회다. 버리고 새로 사야 하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가습기 필터에 키우는 캡을 구입할 수 있을까요? 저희 개가…"


개가 망가트렸다는 말에 상담원의 미소가 느껴진다. 업체에서도 완제품을 들여와 파는 거라 부품을 따로 팔지 않지만 반품으로 들어오거나 하자가 발견되어 제고로 갖고 있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 후 다시 연락을 주신다고 했다.


"없어요. 판매하지 않습니다" 아니라 찾아봐 주신다는 말에 이미 위로와 감동을 받았고. 창고에 남는 필터 캡이 없다 해도 괜찮았다. 좋은 물건을 파는 좋은 기업을 만났다. 같은 제품기쁘게 다시 구매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  필터 캡을 보내줄  있다는 연락이 왔다. 상담원과 필터 캡을 찾아봐주신 직원 덕분에 가습기를 다시 사용할  있게 되었다. 지구에 쓰레기를 더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마음 포근하고 촉촉해지는 연말 선물이 되었다. 내 행복이 물방울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필터 캡을 2개 보내주시다니. 백 년은 더 쓸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에서 망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