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것
"그래, 그렇게 됐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엄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아는 채 하지 않았다. 주어와 목적어가 빠져있는 짧은 문장이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신기하게도, 나는 두 가지의 감정이 한 번에 들었다.
한 가지는 이제야, 드디어 편안한 곳으로 가시겠구나 하는 다행스러운 마음과
나머지는 이제 와서 못 해 드린 것들에 대한 시간들에 후회와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요양병원에서 마주했던 할머니의 모습은 가냘프고 티 없이 맑은 어린 소녀와 같았다.
수년간 몸이 불편하신 탓에 식사도 하시지 못하고 콧줄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아오셔서 그런지
할머니 근처에 가면 항상 뽀얀 아기 향기가 났다.
장례를 치르고 하늘로 모시던 날.
명절에도 그렇게나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가 슬펐겠지만 표정들은 다양했다.
슬프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 밤새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훌쩍이는 사람, 그리고 이 상황을 담담하게 지켜보는 사람.
아직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별을 많이 해보지 않았던 나라
그저 이 상황이 낯설고 영화에서만 보던 그 장면에 나라는 사람이 툭하고 떨어져 갈피를 못 잡는 상황과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정말로 많이 아끼고 사랑했던 하얀색 말티즈가 있었다.
하지만 2년 뒤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나게 되면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 아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 아이를 보낼 때 정말로 슬펐지만 한편으로 다행인 건 그 아이의 현재 생사를 모르기에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해피엔딩으로 기억에 남았다는 것이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더라면 나는 더 큰 아픔과 상실감으로 평생 못 박힌 슬픔으로 지냈을게 뻔하다.
이런 이별은 있었지만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로 간다는 게 처음과도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엄마와 이모들 보다도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차갑지만 편안하게 눈을 감고 계신 할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직접 만졌을 때
촉촉하고도 신기하게 할머니 특유의 아기냄새가 여전히 났다.
내가 상상으로만 해오던 시신의 모습과 사뭇 다르게 전혀 무섭지도 않고 그저 따뜻하고 고요했다.
할머니를 만지고 손 끝에 남은 그 촉감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할머니의 육신을 화장하던 날, 할아버지와 함께 안치될 납골당 근처 가장 가까운 화장터에 갔다.
할머니께서 누워계신 관을 마지막으로 보고 우리는 화장터에 작게 달린 대기실로 갔다.
우리는 말없이 서류 한 장을 돌려가며 보았다.
이용료 단돈 5만 원이라는 글자가 슬픔에 칼을 더했다.
최신 방식의 화장이 아닌 옛날 전통 화장 방식으로 진행되는 거라 시간도 배로 걸리고 값도 훨씬 저렴했다.
왜 여기로 선택하게 되었냐 뒤늦게 물어보니 동선상, 납골당이랑 가장 가까워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물론 나는 영혼을 믿으니 할머니의 영혼은 이미 빠져나가 육신만 남은 거라 스스로 위안 삼으려 했지만
5만 원이라는 금액에 한평생을 훌륭한 엄마로서, 지혜로운 아내이자 따뜻한 할머니로서 살아온 수많은 시간과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진 세월의 조각들이 고작 2시간 채 안 되는 시간에 타버리다니 남는 건 슬퍼하는 가족들의 곡소리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허망하다는 느낌이 뭔지 알았다. 이때까지 내가 느낀 허무함은 허무함이 아니었다.
오랜 병원생활로 드시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모두 누리시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만 하는 상황에 자식들의 슬픔과 한, 그리고 엄마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이번일을 계기로,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다.
그 시간 동안 깨달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생각날 때마다 나는 메모장을 켰다.
- 현재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을 것,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 고인에 대한 눈물은 미련과 후회, 그리고 기억이다.
-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한 영혼도 뼛가루가 되면 한낱 자연의 일부가 된다.
- 천륜은 피할 수 없다.
-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은 사랑을 낳는다.
- 내리사랑은 모성의 근원이다.
- 어머니는 위대하다.
개인적인 것들에 대한 글도 더 있지만, 나머지는 내 속으로 품겠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편안하게 이생에서 누리지 못한 것들을 마음껏 누리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보내드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