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순간
해외봉사가 가고 싶었다.
대학교 1학년, 내가 제일 해보고 싶은 것을 여러 가지 생각해 보다 ‘해외봉사’가 떠올랐다. 그 당시 비행기도 한번 타지 않은 내가 세계 여러 국가를 방문해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해외봉사를 가고 싶어진 다음날부터, 해외봉사 공고, 후기들은 진짜 다 찾아본 것 같다.
기업에서 주관하는 해외봉사 면접을 처음 보러 갔을 때, 고등학생 시절부터 한 봉사 이력들을 종이로 다 출력했고, 봉사의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동안 봉사를 하면서 내가 느꼈던 점을 기록한 공책을 챙기고, 나에게 강점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적어 나만의 이력서를 만들어갔다.
엄청난 준비를 했던 면접이었는데, 나는 자기소개 한마디도 못했다. ‘안녕하십니까..000..입...니..ㄷ..ㅏ’ 너무 긴장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긴장이 풀릴 때쯤 이미 나에게 남은 질문은 하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조끼를 입고 해외봉사활동을 하는 사진을 보고, 최대한 비슷한 조끼를 입고 갔던 나는 '이 조끼가 활동복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말을 너무 못 해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들을 모두 인쇄해왔다고 말하며 정리한, 그리고 만들어간 서류들을 면접관들에게 드렸다.
'그렇게 하고 싶었으면서, 나 왜 이렇게 면접 못 봤지?'
후회하고 자책하며 보낸 2주가 지나고, 내가 받은 결과는 합격이었다.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종이 뽑아간 것들을 좋게 봐준 걸까.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해외봉사 단원이 되었다.
합격 후, 출국 전까지 한 달 동안은 한국에서 '완벽한 해외봉사'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준비캠프를 통해 단장, 부단장을 비롯한 사진, 기록, 영상 등의 역할을 정했고, 크게는 3개의 조로 나뉘어 1-2학년, 3-4학년, 5-6학년의 아이들을 맡아 교육수업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각 조는 매주 1-2회씩 모여 수업 시연을 하고, 캄보디아 현지인들을 위한 문화공연을 준비하고, 필요 물품을 구매했다.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까지 우리는 혹시나 구매했던 물품들이 누락되지는 않았을지 꼼꼼하게 챙겼고, 개인이 맡은 수업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그렸으며, 환승 등 틈나는 시간마다 모여 문화공연 준비를 했다.
1월 15일부터 25일까지 약 10일의 기간 동안, 하루 빼고 우리는 새벽 4시에 기상해 씻고 아침체조를 했고, 순서대로 돌아가며 아침과 저녁 식사당번이 되었다. (식사당번이 된 날 혼자 또 잘하고 싶어 덜렁거리다가 화상을 입어 모두의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다.)
캄보디아에서 보통의 하루는 4시 기상, 아침 운동, 아침 식사, 학교 이동, 오전 수업, 점심 식사, 건축 봉사, 숙소 복귀, 저녁 식사, 각 조별 수업 준비, 전체 회의, 문화공연 연습으로 흘러갔다.
내가 해외봉사를 통해 얻은 것
1. 나는 사랑을 눈으로 봤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 그리고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는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보았다. 2주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 날 아이들과 나는 사랑을 교류했고,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나누고 왔다.
그리고 함께 간 단원들과의 정(사랑)도 빠질 수 없는 것 같다. 준비기간부터, 해외봉사 과정까지 2달간 동고동락하면서 우리는 식구가 되었다. 지금은 현실적인 문제로 자주 보진 못하지만, 가끔 안부를 묻는 것조차 나에겐 너무 반갑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2. 나는 나다울 때 가장 멋있다.
힘들 땐 힘들다고, 슬플 땐 슬프다고 말하는 방법을 배우고 왔다. 텐션이 높지 않은 내가 텐션이 높은 척을 할 때, 리더십이 없는 내가 리더십 있는 척을 할 때, 나답지 않게 ‘척’을 할 때 사람들을 불편함을 느낀다. 물론 내가 제일 불편하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 장단점이 무엇인지 많이 느끼고 오는 계기가 되었다.
3. 힘들 때 가장 먼저 꺼내보는 추억이 되었다.
사람들은 노래, 영화 등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기도 한다.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건 해외봉사 때 썼던 일기장, 그리고 사진들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운동을 하고 교육봉사를 하고, 건축까지 하는 일정에 밤마다 1~2시간씩 공연 연습을 했던 단원들. 그때의 추억이 나는 너무 따뜻하고 소중하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해외봉사를 통해 나는 많이 성장했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고,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무뎌지기도 한다) 남이 아닌 스스로의 나를 온전하게 갖추는 계기가 되었고, 힘들었던 기억이지만 이젠 아름다워진 추억을 꺼내보는 멋진 사람이 된 것 같다. 내가 왜 해외봉사에 끌렸는지, 그렇게 간절히 원했었는지, 정답을 알게 된 여정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첫 번째 해외봉사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2번이나 해외봉사를 더 갔다는 사실. 그 이야기도 꼭 꺼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못다 한 이야기... 온전하지 못했던 나
사실 첫 번째 해외봉사에서의 나는 거짓된 나였다.
해외봉사를 가려면, 활발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MBTI E라고 말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억지로 나를 밝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발대식, 교육봉사와 문화공연준비 등 모든 준비과정 동안 사람들은 나에게 지치지 않는 체력, 밝은 에너지가 부럽다고 했지만, 사실 나도 애썼다. 해외봉사를 가고 싶다는 간절함 하나로 해외봉사를 합격했기에 지치고, 힘들다는 걸 나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준비기간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현지에서도 힘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더 힘나게 해 주려고 옆에서 더 시끄럽게 하고, 같이 나가자고 더 많이 말하고, 해외봉사 2주의 시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진실게임에서 사람들은 나에게 나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해외봉사의 경험이 처음이라 서툴렀고, 간절히 원하는 걸 이뤄본 적이 처음이라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