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살았던 성남시 은행동 아파트 단지 입구에 서점이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그 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소담출판사에서 나오는 세계 명작 같은 걸 뒤적이며 노트에 베껴 쓸 만한 글귀를 수집했고, 때로는 만화잡지를 기다렸고, 좀 커서는 약간 근사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철학 서가의 두꺼운 책을 꺼내 들곤 했다.
남을 의식하는 행동이 많긴 했지만 - 그 서점에는 내가 속으로 좋아하던 동네 친구도 들르곤 했다 - 순수하게 책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곳은 일찍이 내게 다른 곳에서 못 느껴본 새로운 기분을 주었다. 일단 서점 주인 어르신이 어린 내 앞에서도 책을 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분사분 말하고 움직이셨다.
나는 나중에 커서는 서점이 꼭 조용한 곳이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는데, 그것과 별개로 어린 손님에게도 정중하게 대했던 서점 어르신의 태도는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나 역시 책을 구기거나 손때 묻히지 않고 조심이 보고 가만 내려놓는 손님이었다.
그래서겠지만 꽤 오래 서서 여러 권의 책을 읽어도 뭐라고 하시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맨손으로 그냥 나가도 눈치 주는 법이 전연 없었고, 어쩌다 간혹 수중에 돈이 있어서 한두 권 골라 계산하는 날에는 꼭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나는, 나만의 숙제가 거기 있는 것처럼 그곳을 일정하게 드나들었고, 정말 많은 숙제들을 그 안에서 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 스스로에게 숙제를 내는 아이 - 혼자인 시간이 많다 보니 그럴 수밖에 - 에게 그런 따스한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그 서점은 지금도 문을 열고 있을까. 다음지도 로드뷰로 그 장소를 찾아가 보니 서점은 없고 ‘MOMO CAFE’라는 곳이 영업 중이다. 서점은 죽은 걸까.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은행동 서점이 아니라 학교가 있는 성남동의 서점에 드나들었다. 대로변인 만큼 면적도 꽤 넓은 그곳은 여러 학교들의 초입에 있는 서점답게 학습지 코너가 절반 이상이었지만 신간 코너도 꽤 널찍했다. 덕분에 ‘베스트셀러’라는 것도 접하고, 신간 기다리는 재미도 알게 되었다.
장서가 많으니 서성거릴 일도 많았고 자연히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런데 작은 은행동 서점보다 널찍한 그곳에서 오히려 눈치 보이는 경우가 더 잦았다. 가끔씩은 내가 수상한 사람 혹은 책 도둑이 아니라는 제스처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구경만 하고 맨손으로 나갈 때는 누군가 내 쪽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그런데 이때는 나도 나이를 조금 먹어서인지, 눈치가 보여도 꿋꿋하게 버텼다. 일단 신간 목록을 훑고 - 요새처럼 인터넷서점 등이 없을 때여서 당시엔 신문의 출판 지면이나 서점의 신간 매대가 신간 목록을 보여주는 기능을 주로 했다 - 다음으로는 읽고 싶은 책을 뽑아서 한쪽의 쿠션 의자에 앉아 본격적으로 읽었다.
책을 사서 보기란 중학생 때보다 외려 쉽지 않았다. 참고서나 문제집 사는 돈만으로도 부담이 상당했다. 책을 사지 않고 너무 구경만 해서 미안할 때는, 읽던 책은 놔두고 대신 안 살 수 없는 문제집을 하나 골라 면피용으로 사서 나오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 앞 서점은 은행동 서점과 달리, 따스한 곳이 아니라 여러 모로 치열함을 일깨우는 곳이었다. 넓고 크고 촘촘한 곳에서 나는 나름의 치열함을 품고 서성거렸다.
이 서점은 지금도 열었을까. 다음지도 로드뷰로 찾아보니, 서점은 없고 ‘안경이야기’라는 곳으로 바뀌어 있다. 서점은 죽지 않는다더니.
내 인생의 서점 두 곳은 이렇게 지금은 (죽고) 없다. 별다른 특색 없는 평범한 동네 서점들. 하지만 나에게는 둘도 없는 인생 서점들. 왜 그곳들은 더 이상 운영되지 못하고 자리를 비웠을까. 나는 물음을 해소할 답을 기대하며 <서점은 죽지 않는다>를 펼친 것 같다.
책의 부제는 이렇다. “종이책의 미래를 짊어진 서점 장인들의 분투기”. 제목대로 이 책에는 서점이라는 공간을 책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창구인 동시에 관계들이 엮이고 풀어지는 열린 마당으로 만든 장인들의 이야기가 가득 실려 있다. 오래도록 ‘서점인들의 교과서’로 불리며 꾸준히 읽히는 까닭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된다. 서점을 살리기 위해 서점인들이 어떤 섬세한 노력을 해나가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실천해 가는지가 펼쳐지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실은 2013년도에도 이 책을 한 번 읽었다. 고백하자면 당시에 처음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주목할 만한 일본의 서점들을 찾아다니며 그 정수를 탐색하는 견문록인데, 한국의 사례로는 이런 책이 만들어지기 힘들겠구나 싶었다. 이것은 내가 잘 몰랐던 탓도 있고, 조금은 일본만큼 무르익기 전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다들 아시다시피 한국에도 특색을 살린 서점 공간들이 정말 많이 생겨났다. 그럼, 서점은 이렇게 살아나는 걸까.
<서점은 죽지 않는다>를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역시 처음 읽던 날처럼 마지막 페이지까지 감동을 지낸 채 읽었으나, 한편 이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내 어릴 적 인생 서점들처럼 평범한 동네 서점은 이대로 살아남기 힘든 걸까. 혹시 장인에 버금가는 솜씨와 열정으로 분투하지 않아도, 그보다는 수월하게 공간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사회적 방안은 없는 걸까.
한 동안 이 고민을 품고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내친 김에 이에 대한 기록도 남길 생각으로 ‘땡땡 리뷰어’에 자원했다. 조금은 독서가 두서없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앞서의 고민을 마음속에 품고 ‘책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겠습니다.
책에 대한 책
요즘 들어 저는 책을 사는 일이 많이 줄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닌 듯해요. 저는 책 만들고 파는 일이 직업인데 책 파는 일이 갈수록 어렵거든요. 다들 무슨 일일까요? 서점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 대형 서점을 찾아가면 웬만한 신간도서는 있으리라는 기대가 더 이상 안 통하고요. 매장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어요. 한편 개성 있는 문화 공간으로서의 작은 서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고요. 많은 것들이 계속 변하는 것 같아요.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요새 들어서는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껴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이 변화를 조금 더 알고 싶어서 관련된 책들을 읽고 있어요. 관심 있는 분들과 책과 서점 그리고 출판의 이슈라고 할 만한 것들을 나누고 싶어요.
최진규
최진규. 충북 옥천에 산다. 한 달에 두 번 꼴로 서울에 가는데, 한 번은 땡땡책 모임으로 가고, 한 번은 책을 들고 서점을 도느라고 간다. <책 만들기 책>을 썼다. 게다가 ‘책에 대한 책들’을 쓰고 있으니... 책으로 뭔가 하는 걸 참 좋아하는 것 같지만... 정말 좋아하는 건 요리, 멍하게 있기, 지키지 않을 계획 세우기.
책
서점은 죽지 않는다 (저자 이시바시 다케후미 | 역자 백원근 | 시대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