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땡책협동조합 Nov 01. 2017

갑자기 오래된 책이
만지고 싶어 진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책을 주제로 한 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항상 나의 시선을 잡아끈다. 제목이나 카피에 '책'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집어 들었다가 너무 재미가 없어서 읽다만 책도 많다. 다행히 이번에 집어 든 책은 금방 끝까지 읽었다. 평소 좋아하는 장르인 추리에 책을 소재로 한 내용이니 취향 저격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연히 서점 리뷰란을 보게 되었다.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오래된 종이책이 읽고 싶어 졌다는 고백이 많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만들어내는 책이라니!



배경인 가마쿠라는 도쿄의 남서쪽에 있는 시(市)로 100년 이상된 건물과 자연 풍경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의 도시이다. (『슬램덩크』 『바닷마을 다이어리』 같은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비블리아 고서당을 운영하는 시오리코는 고서에 대한 지식이 매우 해박하며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어릴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책을 읽지 못하는 다이스케가 할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나쓰메 소세키 전집의 감정을 의뢰하기 위해 비블리아 고서당에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서당은 그야말로 오래된 책을 사고파는 서점으로, 주로 고서 수집가들이 애용한다. 싸게 파는 책을 사들여 높은 값에 되파는 '책등빼기'들도 들락날락한다. 나에게 없는 취미라 (혹시 모르지, 돈이 많았으면 수집병에 걸렸을지도?) 이 책을 읽으며 고서 수집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일본 책의 이야기라 조금 멀게 느껴지긴 하지만 등장하는 책들이 대부분 한국에도 잘 알려진 책들이라 그렇게 생소하지만은 않다.


이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chapter)이 시작할 때마다 중심이 되는 책과 특징에 대한 짧은 소개글이 나온다. 특히 유명한 문인의 소설집은 다양한 형태로 출간된 경우가 많아서 어떤 출판사에서 나온 어떤 판형의 책을 다루는 것인지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다. '1938년 이와나미쇼텐 출판사에서 일반교양서적을 저렴한 가격으로 창안한 것이 현재 신서판의 효시'라거나, 문고판이 'A4용지를 두 번 접은 크기로 염가형 서적에 많이 쓰이는 판형'이라는 등 책의 형태를와 배경을 상상하며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의 물리적인 형태와 내용 모두 시오리코가 사건을 추리하는 데 커다란 단서가 된다. 책에 적힌 사인의 위치와 초판 발행일 등을 통해 가짜 사인본임을 알아낸다든가, 전집 중 한 권에만 '장서인(책의 소유자가 자기 수집품에 찍는 도장)'이 찍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따로 산 책임을 유추하는 식이다. 더 나아가 책의 소유자였던 다이스케의 할머니가 어떤 사연으로 그 책을 따로 샀는지까지 추리하기에 이른다.  


전 오래된 책을 좋아해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꼭 안에 담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책은 책 속 내용이기도 하지만 책 표면에 덕지덕지 붙은 시간과 책장을 넘기던 사람의 온기이기도 하다. 때로는 책을 둘러싼 사연이 책 속 내용보다 더 무겁게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그저 대량 생산된 소모품으로만 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은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다. 그것도 무려 7권까지 출간되어 있다.


책은 출판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고서점을 운영하려면 출판사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질 수밖에 없다.


산리오SF문고는 마니악한 라인업으로 유명했어요. 
일본에서는 아직 낯선 비영미권 SF소설과 환상문학을 다수 출판했는데, 
매출 부진으로 십 년쯤 지나 없어졌어요. 
이 브랜드에서만 번역판이 나온 작품이 꽤 많아요. 
이곳에서 나온 모든 책을 모으는 SF팬들도 적지 않죠.

이 설명을 읽다 보니 몇 년 전에 등장했던 '불새 출판사'라는 곳이 떠오른다. 불새 출판사는 '보고 싶은 SF가 나오지 않아서 직접 출판사를 차린' 1인 출판사였다. SF소설의 고전 격인 책들을 직접 번역해 17권가량 출판했지만 적정 수요가 충족되지 않아 2016년 문을 닫았다. (참고 : SF 출판사 '불새' 새하얗게 불태우다 [남일 같지 않은 기분...?]) 



불새 출판사의 책이 품절된 지금, 책을 찾아보면 중고서점에서 정가보다 조금 더 비싼 가격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있을 때는 수요가 적어서 생산사를 지켜주지 못하고 생산자가 없어지면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대중적이지 못한 영역을 덕질한다는 것의 비애란...  


이런 이야기들이 재미있는 게 나뿐만은 아니겠지? 책 자체보다 책을 둘러싼 세계가 나를 매료시킨다. 책 옆에 또 책이 있고 책 속에 또 다른 책이 있는, 책의 세계를 깊숙이 유영하는 시오리코를 보며 대리만족을 한다. 


시오리코가 추리를 할 때 장단을 맞추는 다이스케라는 캐릭터에게는 '책을 읽을 수 없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독자들이 책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해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몇몇 상황에서는 다이스케가 책을 잠깐 들춰봤다면 미스터리가 시시하게 풀리고 말았을 테니까. 하지만 책만 읽는다고 모든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오리코의 지식과 추리 능력은 책만 읽는다고 갖추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다른 추리 소설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탐정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다. 책에 대한 깊은 지식에 더해 인간의 관계와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갖춘, 이전에는 없었던 탐정 캐릭터의 탄생 아닐까. 



아오키 문고의 『논리학 입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에피소드에서는 책을 팔려는 남편과 팔지 못하게 하려는 부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남자는 전과가 있고 여자는 술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 읽으며 떠오른 만화책이 있다. 『자학의 시』라는 만화책이다. 구제불능, 누군가에게는 막장이라고 불릴 삶이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 잘나고 예쁜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도 나름 임무가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이런 이야기에서 더 큰 치유를 받곤 한다. 



1권에서 등장해, 7권까지 주요 소재가 되는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이다. (나는 아직 1권까지밖에 읽지 못했지만.) 이 책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왜 이 책을 시리즈의 중심 뼈대로 삼았는지 이해가 갔다. 여기서 등장하는 『만년』은 책장의 책머리,책입, 책발이 아직 잘리지 않은 언컷(uncut) 본이다. 


사진에서는 책입이 떨어져 있다 (출처 : http://garadanikki.hatenablog.com)


"책장을 뜯지 않으면 어떻게 읽죠?"

"페이퍼 나이프로 뜯으며 읽어야죠."


그렇다면 이 『만년』은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는 뜻이다. 무척 희귀한 책이 아닐까?


웹에서 찾아보니 진짜로 『만년』 언컷 본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http://garadanikki.hatenablog.com/entry/20150112/1421013600


문득 예전에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나왔던 결말을 봉한 추리소설 『이와 손톱』 생각이 났다. 조금 다른 목적이긴 하지만 독자가 직접 뜯어서 볼 수 있는 책이라니, 왠지 뜯을 때 오소소한(?) 쾌감이 있지 않을까. 


다자이는 이십 대의 젊은 나이였지만, 
이 책을 위해 십 년에 걸쳐 오만 장의 원고를 썼다고 해요. 


다자이 오사무는 스물 몇의 나이에 자살 시도를 한 후 첫 단편집 이름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라는 의미로 『만년』이라고 지었다. 이 책에는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한 '오바 요조'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어릿광대의 꽃>이 실려있다. '오바 요조'라는 이름은 『인간실격』에도 주인공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나는 이 단편집 한 권을 위해 10년을 허비했다. 만 10년 동안 보통 시민들이 먹는 것과 같은 산뜻한 아침식사를 하지 못했다. 나는 이 한 권을 위해 은신처를 잃고, 끊임없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세상의 찬바람을 호되게 맞으며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 혀를 데고 가슴을 태우며 내 몸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때까지 일부러 망가뜨렸다. 100편이 넘는 소설을 찢어버렸다. 200자 원고지 10만 장. 그래서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이것뿐. (...) 그렇지만 나는 믿는다. 이 단편집 『만년』은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선명하게 당신의 눈에, 당신의 가슴에 침투해 갈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나는 오직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 어쨌건 『만년』 한 권이 당신의 두 손의 때로 까맣게 빛 날 때까지 몇 번이고 거듭 애독될 것을 생각하면, 아아, 나는 행복하다."


오직 이 한 권 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니, 누군가는 오버스럽다고 평할지 몰라도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열등감과 절실함이 표출된 글, 그리고 작가가 실제 여러 차례의 자살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 그의 문학에 이끌리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곤 할 수 없을 듯하다. 


책 바깥에 존재하는 작가의 삶은 책보다 더 많이 회자되기도 한다. 다자이 오사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다자이 오사무가 이 사실을 안다면 행복해하려나... 모르겠다. 


시오리코가 소장하고 있는 만년』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사인까지 적혀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는지 이런 메시지와 함께.


자신을 가지고 살아가자. 살아있는 이들은 모두 죄인이니.

이 책을 읽다 보면 '책은 책 이상'이라는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김민희 "어쨌거나 책 이야기"

책 속으로 진지하게 걸어 들어가다가도 자꾸만 책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이 정신머리를 어찌하면 좋을까. 이게 덕후 본능인가. 책도 겉 핧기, 인생도 겉 핥기. 상상속에서는 경계 없이 자유로운 유목민이지만 현실에서는 방향을 잃은 채 갈지 자로 걷는 주정뱅이일 뿐이다. 그저 뭐라도 시작해보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 어쨌거나 책 이야기입니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미카미 엔지음 |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