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장편소설 <세 여자> 서평
대학시절 나는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학생운동 그룹에서 활동했다. 그때의 내 생각들, 활동들을 돌이켜보면 무수한 이불킥 때문에 내 이불은 이미 대기권을 벗어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내 실수와 시행착오, 어설픔이 거름이 되어 지금 내가 있는 것이고, 지금의 나 또한 훗날 돌아보면 실수투성이 거름 덩어리일 수도 있다. 그렇다한들 의미가 부여될 뿐이지 창피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내 실수와 시행착오의 바탕에는 혁명에 대한 낭만적 감성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노동법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노동해방 전선에서 쓰러져간 혁명가들의 삶을 동경했고, 그들의 현실적 고뇌보다는 그들의 비극적 삶의 궤적에 더 집착했다. 비극적인 결말과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은 얼마나 순수하고 낭만적인가. 내가 속한 학생운동 그룹이 조선공산당의 몇몇 혁명가들을 자신의 뿌리처럼 여기기도 했지만, 조선공산당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실패한 혁명가들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제대로 꽃 피워보지 못한 채 떨어져갔던 정치세력, 남과 북 모두에서 배척당한 정치세력, 조선공산당이야 말로 순수와 낭만의 결정체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자본론』을 읽으며(정말 읽었는지 궁금하다) 정치경제학 공부를 하거나 철학 세미나를 하는 동안 나는 월북한 시인들의 시를 읽거나 조선공산당사를 공부했다. 그때 만난 이름들-박헌영, 김단야, 이재유, 이현상의 이름이 앞에 서고, 김재봉, 이관술, 이승엽, 임화 등의 이름이 이들을 받쳐주었다. 당시에는 이 이름을 소리내어 읽으면 종로 네 거리에서 순이를 만난 것처럼(임화의 시 ‘네 거리 순이’ 인용) 가슴이 뛰었을 뿐,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핍박을 남성들만 받은 것도 아닌데 혁명가는 죄다 남자였다는 사실을 인지할만큼 내 젠더 감수성이 뛰어나지 못했던 거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같은 내가 아는 여성혁명가도 있었지만 조선인 여성혁명가는 내 인식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 여자』의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세죽은 박헌영의 아내였다가 김단야의 아내가 된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 재혼이 쉽지 않았을텐데 신여성이라 역시 달랐구나, 딱 이 정도에서 생각이 멈춰있었고, 왜 남편의 친구이자 동지와 결혼한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허정숙은 화요파 임원근의 부인이었다가 이혼하고 화요파와 견원지간인 북성파의 송봉우와 연애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그녀 역시 내게는 혁명가보다는 신여성이었다. 훗날 출판사 다니면서 편집한 책『경성 엘리트의 만국유람기』에서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의 세계여행기를 보면서 허정숙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지만 단편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내게 식민지 시기의 여성들은 죄다 그냥 ‘신여성’이었다. 맑시스트도, 기독교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도, 최승희나 나혜석 같은 예술가도 그냥 다 신여성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나마 주세죽, 허정숙은 이름이라도 알았는데, 『세 여자』의 마지막 주인공 고명자는 이름마저 낯설었다. 조선공산당 관련 책이나 논문을 여러 편 봤지만 그녀의 이름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비중이 낮게 다뤄졌거나 아예 다뤄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민족변호사 허헌의 고명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던 허정숙, 함흥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을 전공했던 주세죽, 충남 부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를 배우며 양반집 규수로 곱게 자랐던 고명자. 이 세 여성의 삶이 서로 만나고 멀어지고 엮였다가 헤어지는 것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다. 이야기 틈새로 박헌영이니, 김단야니, 여운형, 김일성 등등 그녀들과 함께 했던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세 혁명가의 삶을 채워준다. 이들의 삶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는데 그 만남과 헤어짐은 물리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상해에서 만났다가 서울에서 헤어지고 모스크바에서 만났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어지길 반복하는 동안 몸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까지도 달라진다. 허정숙은 모택동과 함께 일본에 맞선 조선의용군이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북한 정부에서 큰 권력을 얻고 박헌영, 무정을 비롯한 과거의 동지들이 숙청당하는 동안에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주세죽은 박헌영이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잡힌 뒤 김단야와 모스크바로 향하고 박헌영이 죽은 줄로만 알고 거기서 김단야와 결혼하지만 김단야가 스탈린에게 숙청당하면서 카자흐스탄으로 유형 가 쓸쓸히 여생을 마친다. 고명자는 일본 경찰의 고문에 못이겨 한때 전향을 하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고 해방정국에서 박헌영과는 다른 노선을 추구하며 여운형과 사회노동당을 창당했지만 한국전쟁 때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개개인들이 겪는 행운과 불운 그리고 우연과 선택이 격동하는 역사와 만나서 일궈낸 풍경 속에서 허정숙과 주세죽과 고명자의 인생도 놓여 있다.
나는 『세 여자』를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기보다는, 조선공산당의 혁명가들을 다룬 소설로 인식하며 읽어내려갔다. 세 주인공의 혁명투쟁에서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지만, 그녀들이 펼친 혁명운동의 무게 중심이 공산주의 혁명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에 더 실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페미니즘보다는 조선공산당사에 대해 더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심사인 것도 책을 재미있게 읽은 큰 까닭이지만,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를 기반으로 쓰인 소설이라서 그런지 더더욱 재밌게 읽어내려갔다. 원래 진수의 『삼국지』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더 재밌고, 조선왕조실록보다는 『해를 품은 달』이 더 재밌는 법이지 않은가.
손에서 놓지 못해 며칠 밤을 새벽까지 읽으면서도 사실 이 이야기들이 왜 역사책이 되지 못하고 소설이 되었는지, 아쉬워했더랬다. 더 재밌게 읽기 위해 혁명가들의 삶을 소개하는 『현대사 아리랑』과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공산당 평전』을 참고하며 읽었는데, 이 책들 또한 여성 혁명가들을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아마도 사료 부족이 가장 큰 이유지 않을까.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사료 발굴이 충분하지 않았는데다가, 여성혁명가들에 대한 자료는 더더욱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허정숙에 대한 자료는 북한에 많이 있겠지만 아마도 김일성의 업적을 치장하는 쪽으로 많이 왜곡되고 편집되어 있을 거다.
왜 여성의 역사는 역사책에 기록되지 못하는지 아쉬워하다가 좀 더 생각을 해보니 차라리 소설로 씌여진 것이 더 잘된 것 같기도 하다. 사료가 충분하다고 했더라도, 이 세 혁명가들의 혁명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을 따라가는 일은 역사책 서술로는 적절하지 않았을 거 같다. 예를 들자면 허정숙은 남성 혁명가들이 허구언날 파벌 싸움을 하는 것을 지긋지긋해 하는데 거기에는 분명 남성성의 정치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 있다. 신시아 인로가 『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에서 다룬 페미니스트의 질문 ‘대통령들은 왜 군사 안보 외교 분야에서 그렇게 남성다움을 과시할까?’, 이 질문이 실제 허정숙의 고민이었을지, 작가 조선희의 고민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책이었다면 이런 고민과 통찰을 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2010년대 페미니즘 열풍이 부는 대한민국에서 100여년 전 활약한 세 여성 혁명가의 이야기를 읽는 것의 의미를 잘 살리기 위해서는 역사책보다 소설책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세 혁명가의 삶을 역사적으로 복원하는 것은 역사책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주인공들에게 불어 넣고, 주세죽과 허정숙과 고명자의 삶을 지금 시대로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역사책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회 변화에 대해 낭만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실패한 혁명의 아름다움을 찾기보다는, 그들이 실패한 까닭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사회 변화를 위한 사회운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조선공산당에 대해서도 내 사회운동의 뿌리로 생각하디보다는 그냥 역사에 대한 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만난 조선공산당 역사가 그동안 내가 만나지 못한 혁명가들이어서, 참 아름답게 빛나고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혁명가들이어서 책을 읽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이용석
원래 땡땡책 협동조합 브런치에서 '타이거즈 팬의 야구책 읽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세 여자』를 너무 재밌게 읽었고 서평을 꼭 쓰고 싶어서 '여자, 소설' 매거진의 객원 필자로 서평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줄줄이 외우고 조선공산당 창당일까지 외우는 조공빠였지만 지금은 혁명에 대한 낭만적 접근을 굉장히 싫어하는 직업활동가입니다. 그렇지만 소설 『세 여자』는 너무 재밌어서 잠 안 자고 읽었습니다.
책
《세 여자》(2017)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펴냄
《경성 엘리트의 만국유람기》(2015)
허헌 외 지음, 성현경 엮음 | 현실문화 펴냄
《현대사 아리랑》(2010)
김성동 지음 | 녹색평론사 펴냄
《조선공산당 평전》(2017)
최백순 지음 | 서해문집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