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선옥, <꽃 같은 시절>을 읽고
실은, 읽으려던 책이 따로 있었다. 좋아하던 남성 소설가가 쓴 재기 넘치는 제목의 소설집이었다. 그런데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넘기는 일이 곤욕이었고, 한 편을 겨우 읽어냈을 때는 불쾌함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작가가 여성 인물을 그려내는 시선에 욕지기가 났다.이 작가가 변한 것이 아닐 터였다. 근 몇 년간 변한 것은 나다. 서평 쓰기로 한 기한은 며칠 안 남았고, 급히 책장을 훑었는데 이 소설이 눈에 띄었다. 공선옥의 <꽃 같은 시절>. 할매들이 마을을 지키는 투쟁을 다루고 있다는 것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출간 당시에 주변 사람들 입에 꽤 오르내렸던 것 같은데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거의 나에게는 그다지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할매들의 투쟁이라는 것도,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도, 그놈의 꽃이라는 것, 시절이라는 것도.
집, 귀신
이야기는 ‘집’에서 시작된다. 서울에 자식들 보내고 집에서 혼자 살던 할매가 죽고, 그런데 빈집을 못 떠나 귀신으로 머문다. 작가는 집을 마치 생명체처럼 묘사한다.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사람 기척이 없다고 해서 무생물에 불과한 집이 영향받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적으로, 충분히 그렇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빈집은 적적해서 제 ‘몸’을 떨어대고, 그러다 못 견디고 스러진다. 할매는,할매였던 귀신은 그걸 잘 알아서 차마 못 떠난다. 반귀신이 다 된 옆집의 백 살 할매도 그걸 알아서 남의 빈집에 들러보곤 한다.
꽃 때문이다
그런데 그 빈집에 외지 부부인 영희와 철수가 와서 깃든다. 그들은 혹시나 싸게, 어쩌면 공으로 살 빈집을 찾던 중이었다. 귀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영희가 그 집에 홀린 듯 들어온 것은 마당 귀퉁이에 핀 복사꽃 때문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영희는 엄마뻘인 그 동네 할매들과 함께 마을 ‘돌공장’ 반대 투쟁에 뛰어들게 된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가 힘든데, 자기 고향도 아닌 타지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대책위원장’이 된다. 이 모든 게 다, 그놈의 꽃 때문이었다. 사실 영희네는 도시 철거촌에서 쫓겨나온 사람들이고, 공교롭게도 이 빈집의 원래 주인(죽은 할매의 큰아들) 또한 서울 용산의 철거민으로 날마다 남일당에 가서 명복을 빌고 오는 사람이다. 그랬으니 결국 또 운명처럼 터전에 대한 ‘투쟁’으로 엮이게 된 것 아닌가, 싶겠지만, 아니다. 꽃 때문이라니까.
소리가 있는 것들: 거미와 참새와 벌, 그리고 지렁이
마을에서 아주 젊은 축에 속하는 영희는, 공장 직원들과 형사라는 사람이 칠팔십 할매들한테 빈정거리고 막 대하는 꼴이 속 터져서 얼결에 대책위원장 자리를 맡지만, 생각할수록 앞이 깜깜하고 눈물만 나온다. 그렇게 망연자실할 때, 귀신이 머무는 집에서 그녀는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 천장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눈앞에서 춤을 추는 거미의 소리, 지붕 밑에서 장난하는 참새들 소리, 뒤안 쪽 뙤창으로 날아 들어온 벌의 소리... 대롱대롱대롱, 뽀시락뽀시락뽀시락, 곤지곤지곤지... 어둑한 방 안에서 그 소리들에 둘러싸여 영희는 큰 위로를 받는다. 집도 몸을 떨며 소리를 내는데, 거미니 참새니 벌이니 하는 작은 것들은 오죽하겠는가.
이 소설에서 ‘소리’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다. 세상에 소리 없는 것이 있을까. 이때 ‘소리’는 곧 생명이면서, 존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전혀 소리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밟히면 꿈틀’하는 것의 비유로나 쓰이는 지렁이조차도 분명한 울음소리가 있다고 소설은 말한다. 들으려고들 안 하지만 소리 있는 것이 또 있다. 여성이다.
“우리는 적막한 속에서 소리 없는 것들의 온갖 소리를 들었다. (...) 꼭 우리들 같아서. 우리도 소리를 안 내고 살 뿐이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은 땅 파먹고 사는 아낙들은 소리가 아예 없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 그래도 우리는 울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울면, 닝꽁닝꽁닝꽁, 지꾸지꾸지지잉, 띠룽띠룽띠루룽, 하는 것들이 우리 울음에 묻힐까봐 울지 않았다.”
여성들, 역사
소설에서 마을 여성들의 연대는 정말로 끈끈하다. 귀신이 되어서도 추억하게 되는, 정말이지 귀신같은 일체감이다. 그녀들이 지렁이처럼 밟혀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나 꿈틀대지 않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녀들을 억압하는 것은 비단 현재의 ‘돌공장’ 자본과 경찰, 법체계 등 높으신 분들만이 아니다. 그 훨씬 이전부터, 숨 쉬듯 억압당해온 역사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남편들, 더 정확히 말하면 가부장제의 소행이다.
새마을운동 한답시고 동네 남자들이 마을 당산나무를 베어내려고 할 때 그녀들은 나무를 몸으로 막아냈다. 이 남편이라는 작자들은 단지 군에서 나오는 시멘트와 모래를 쓰기 위해 멀쩡한 돌담을 허물고 블록 담을 쌓고, 심지어 그 기념으로 애먼 개를 잡아 잔치를 벌인다. 이제 막 굳기 시작한 시멘트 담을 부수고 욕설을 들으며 다시 돌을 쌓는 그녀들은, 그 돌들만큼이나 정답고 단단하게 쌓여온 존재다. 언제든 저항이 필요할 때 머리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고, 그 울분과 한을 놀이나 노래로 풀 줄도 알았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송홧가루 노랗게 달리던 그 봄에 우리는 군서기 몰래, 면서기 몰래, 순경 몰래 담근 술을 이고 지고 화전놀이를 갔었다. 한강쟁이댁, 시앙골댁, 살푸쟁이댁, 밤실댁, 오류골댁, 해징이댁, 용수막댁, 무수굴댁이 장구 둘러메고 솥뚜껑 거꾸로 들고 산에 올라갔다. 우리는 이쁜 치마저고리 입고 산에 올라 술을 먹고 꽃전을 지져먹고 장구를 치고 놀았다. 새끼들이 울건 말건, 서방들이야 굶건 말건, 시부모들이야 눈을 흘기건 말건 우리가 그만 놀고 싶을 때까지 지치도록 놀았다.”
시(詩), 쓰지 않음으로 쓰기
이 할매들의 (귀신까지 포함한) 오래된 우애는 현재 투쟁에서 다시 재현되는데, 대책위원장 영희와 예비 소설가 해정의 우정이 그것이다. 해정은 ‘자연에서 치유받는 인간’이라는 소재로 출판사와 장편 계약을 해서 이미 계약금까지 받아놓은(이미 써버린) 상황이다.그러니까 그저 밀린 원고를 쓰기 위해 ‘조용한 시골 작업실’을 마련했을 뿐인데 투쟁에 엮여버리게 되는 셈이다. 그녀보다 한발 먼저 엮여버린 영희, ‘우리 할매들’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울먹이는 영희에게 속절없이 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해정도 더 이상 자연에서 치유받는다는 식의 속편한 힐링 스토리를 쓸 수는 없게 되었다. 사람은 곧 죽어도 자기 사는 것만큼을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쓰지 않는 것이 더 쓰는 것에 가까운 상황마저도 온다.
해정뿐만 아니라 영희도 꽃 때문에 눌러앉은 사람답게 영락없는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들이 좋아.”
“여기 안 떠날 거야?”
“할머니들이 좋아서.”
“요새 시는 안 쓰냐?”
“할머니들이 시야.”
그리하여 꽃 같은 시절
할머니들이 시라니,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비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나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나도 그 말을 흉내내야 될 형편이다. 할매들이 소설이라고. 투쟁하는 할매들 이야기를, 아니면 할매들을 닮은 이야기를, 집인지 귀신인지 그도 아니면 지렁이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야기를 꼭 쓰고 싶은데, 내가 과연 그걸 쓸 수 있는지, 그게 지금인지, 아니면 아주 나중일지 모르겠다. 어찌됐든 나는 이토록 뻔한 ‘여성적’ 상징으로 가득 찬, 따뜻한 감성이 절절 흐르는 소설을 전처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무시하기는커녕 울지 않고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밀양 할매들, 청도 삼평리 할매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할매들을 알기 전과 후의 인생이 나에게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경계가 된 최근 2년간이 나에게는 ‘꽃 같은 시절’인 것 같다. 결코 편안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꽃이 힘을 발휘하는 건 다른 누구보다 ‘울고 있는’ 사람 앞에서이기 때문이다.
“내가 얏닐곱살 때 울 오무니가 애기를 낳다가 돌아가싰거등. 할머이가 방문을 탁 열고 나옴서, 아이, 느그 어매 죽어부렀다, 허등만. 죽는 것이 뭣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슬프제이. 막연허게 슬픈게 말레에 우두근히 앉아서 다무락 옆에 모란꽃 벙그러진 것만 가만히 보고 앉았어. 모란꽃이 하도 이뻐서 그것 보니라고 내가 어매 죽은 것을 깜빡 잊어묵었어. 그러니, 그때 모란꽃같이 이삔 것이 한 태기도 없었으면 얼매나 더 설워이? 그렁게 자네도 맘이 힘들수록에 한사코 모란꽃맹이로 이삔 것만 생각허소이.”
(2015.4)
양선화 "여자, 소설: 한국 여성 작가 장편소설 리뷰"
내 이십 대 전체를 쥐고 흔든 것은 너무나 자명하게도 ‘소설’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가 쓴 소설’이었다. 지금은 어느덧 반대가 되어서, 가장 사랑했던 박민규를 절독했으며 / 전작을 사서 모았던 김도언은 이름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 거침없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천명관의 세계관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김영하나 김연수 같은 명실상부 지적이고 세련된 중견 작가의 소설을 더 이상 업데이트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안 생기고, 조정래 김훈 황석영 등 할아버지들의 훈화 말씀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나니 여자 소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 사실 여자들은 늘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렇다고 내가 어떤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기점으로 일부러 남소설 여소설을 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쓸어 담아온 책들이 다 여소설인 걸 발견하며 놀라고... 뭐 그런 흔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