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그로스의 『편집의 정석』, 그리고 고은의 『만인보』
주말 파주 어느 북카페에 들렀다. 그런데 유명 출판사 서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전집으로 꽂힌 그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잠시 구경할 수 있었다. 대략 600여 페이지에서 900페이지가 넘는 연작시집 11권으로 된 이 시집은 전집 모두 구입할 경우 정가는 49만 원이란다. 정가 9천 원의 시집을 1986년 처음 출간한 이후 2010년까지 단행본의 연작시집 30권을 발간했고, 서른 권의 연작시집들은 3만 원에서 3만 5천 원 가격의 열한 권이 되었다. 양장본으로 완성되기까지 늘 그의 시집을 출간했던 출판사의 특별한 기획이 있었고, 두 대학기관이 후원했다. 대학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이며 비평가들이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한 지방자치단체는 박물관에 이 시가 완성된 그의 서재를 재현했다.
보통 ‘시’는 ‘시’를 ‘시’로 만드는 무엇들 때문에 시집을 한눈에 훑어 읽는 것은 대개 불가능한데, 『만인보』는 맑은 날 공원에서 만보 걷는 시간이면 열한 권 모두 대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의 시는 분명 아니다. 평자들의 평가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스탕달의 『인간희극』이나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조이스의 『율리시즈』 혹은 『더블린 사람들』처럼 지금 여기를 살아온 인물군상들의 초상을 총망라하는 문학 작품을 기획한 듯하다. 혹은 예전 국내 일단의 평자와 문인들이 폄훼했던 그 모더니즘의 아이콘들, 엘리어트의 『황무지』나 윌리엄스의 『패터슨』을 벤치마킹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이 만인의 기록이 여백의 미학이자 종이 낭비인 시집일 필요가 있었을까? 구태여 만인을 채워야 제목에 걸맞았을까? 출판사의 편집과 출판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원고의 만용을 읽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추어 출판인으로서 작년 장난치듯 책을 제작해보니 편집을 비롯해 도서 제작과 배포 등 출판 일반에 대한 나의 소양이 너무도 일천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일찌감치 사뒀지만 그저 꽂아만 둔 이 책을, 올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서 이제야 펼쳐들었다. 그런데 오지랖 넓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북카페에 가지런히 곱게 꽂혀 있던 『만인보』. 저런 어마어마한 양장본 전집 시집을 완성하려면 시장에 내놓기까지 어떤 수고와 노력들이 참여했을까?
글로 편집을 배우며...
편집자는 세상을 많이 알아야 하고 교양이 있어야 하며, 기술적·재정적·정치적 및 기타 위험을 해쳐나가면서 본인이 후원하는 프로젝트를 끌고 나갈 능력이 있어야 한다. (「편집자가 필요한가」 리처드 커티스, 78쪽)
“저자는 여전히 출판사 내에서 모든 단계에 걸쳐 본인의 책을 봐줄 누군가를 필요로 해요. 우리는 모든 부서와 함께 일을 해야 하고, 그것도 훌륭히 해내야 하죠. 그중에서도 우리는 촉진자와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해요.” [중략] “우리가 돈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건 하늘이 알아요. 작가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어요. 책을 사랑해야 해요. 작가는 출판사 내에서 본인의 작품을 사랑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해요.” [중략]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편집자의 많은 자질이 있다. 그중 꼽아본다면, 취향·안목·개인적인 정서적 반응·질서와 조직에 대한 의식·결단력·헌신·부드럽고 애정 어린 관심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편집자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79쪽)
그렇다. 편집자는 출판제작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자신의 원고가 그냥 종이에 인쇄된 줄 착각하는 저자도 있을 수 있으나 모니터의 원고보다 책으로 나온 글이 더 근사하고 완전해 보이는 것은 단순히 인쇄기와 종이의 품질 덕분은 아니다. 아직 저자의 언어를 책이라는 물질로 완성하기까지, 그리고 그 책이 독자의 손에 들려 독자의 언어로 소화되기까지 진행을 촉진하고 작업을 지원하는 이가 편집자이다. 원고를 교정교열하여 종이에 옮겨지는 동안 내 글을 읽어주는 최초의 독자이다. 누구보다 꼼꼼히 읽어줘야 할 날선 비평가이면서도 실제 성격과 전혀 상관없이 편집자들은 모두 몸에 체지방 대신 사리를 쌓은 듯 예의 바르고 정중하다.
책 만드는 작업을 하다보면 만나게 되는 많은 편집자들이 여성들이다. 편집뿐만 아니라 출판에 참여하여 많은 영역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만난다. 그런데 편집의 정석에서 말하는 편집자와 출판인의 자질 외에 여성 편집자들, 여성 출판 노동자들에게 무엇이 더 있어야 할까? 혹시 침묵? 가만히 있으라고?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 고발로 세상이 뒤집어질 듯 소란스러운데 출판 노동자들이 성폭력에 안전할 수 없는데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한 척하고 있다.
최근 문단 내 성폭력을 지적한 시를 발표한 시인이 성폭력을 용인해온 문단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을 때, 글쓰기가 개인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시인 개인의 일탈을 구조적인 문제로 부풀려선 안 된다고 반발했던 작가와 시인들이 있었다. 내가 아는 만 명의 이야기를 행갈이와 문단 나누기로 행과 연을 만들어 아래아한글로 저장해두었다고, 한국 사회에서 내가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문학이라는 학제, 저마다 고유의 일률적인 시집 디자인 속에 본의 아닌 정형시를 생산하는, 그렇게 시인을 시인으로 공개하는 출판사들, 가상의 독자를 구성하는 비평과 리뷰, 문학 번역 시스템, 사제의 도리 중심의 문하생 양성 등 한국시를 한국시답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시인은 만들어지고 시는 출판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 글을 쓸 수 있다. 더러는 생계를 위해 글을 쓰고 더러는 생계로 인해 글을 미뤄두기도 하지만, 또는 세상에 더 재미있는 일을 발견하여 시 쓰기를 멈추었다 해도, 또는 언어가 시인을 떠났다 해도, 계속 쓰든 안 쓰든 시인은 이미 세상에 나온 그의 시 때문에 이미 늘 시인이다. 언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에게 언어가 찾아오는 날, 그는 여백의 미를 시학으로 삼으며 연신 줄을 바꾸고 행을 띄워 만인의 기록을 이어갈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시인도 하지 못했던 업적을 그는 완성할 것이다. 만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읽히지 않고 박제된 시집의 경험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잘 쓴 시가 아니어도 출판됐던 경험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과서에 이미 수록된 시들을 삭제하고, 이런저런 기념비를 철거하고 기념시를 지운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개인의 삭제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개인을 망신 주고 입을 막기 위한 미투 운동이 아니다. 여전한 구습이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앙시앙 레짐의 타파이다. 국내의 어떤 형식의 작가협의체들이 존재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어떤 조직이든 혁명적 선언이 필요하다. 구성원인 저자 혹은 작가들이 이들의 정체에 차별받지 않고 동등히 교류하며, 민족과 민주주의와 인생과 사랑을 노래하고 독자 혹은 관객, 청중들과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문학적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성평등 교육을 위한 매뉴얼과 워크숍 제도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문학을 연구하고 비평하는 학계 또한 연구자와 교육자들이 성평등의 언어와 사고를 실천하는 문화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출판계 역시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출판이라는 영역에서 더 이상 같잖은 권력을 휘두르며 폭력적인 접대와 접촉을 강요하여 출판의 전문인력들을 무기력과 무의미에 빠지게 하는 야만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출판 노동자들의 예의바름과 정중함이 희롱과 폭력에 희생되지 않고 책이라는 결과물에 녹아들기 원한다. 독자들이 좋은 책을 위해 누구와 함께할 것인지 분명하다. 글쟁이와 책쟁이들의 매니페스토가 나올 때이다. 정석대로 하자.
#with_you_book_people
박혜란 "아무 리뷰"
아무 리뷰는 분야와 장르를 상관하지 않고 저자의 의도나 출판사의 방향과 상관없이 편안하게 읽은 감상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