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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May 29. 2019

『배틀 그라운드』 독후 질문들

양육의 보편적 기회와 건강하고 존엄한 몸을 위하여


"우리는 이제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수행하기보다는
여성과 소수자의 삶을 취약하게 하는 데 기여하면서
개인의 권리와 경쟁해 온 국가에 대항하는 싸움을 시작하고자 한다."
(백영경, 21)     


낙태죄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던 성과재생산포럼이 기획한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후마니타스)가 정말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낙태였을까? 목차만 보더라도 단순히 임신 중단의 허용만을 요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전반부의 글들이 낙태죄 폐지운동의 정치적 의미를 설명하고 (낙태죄를 정치화하기, 이유림), 여성 건강권과 국가의료보건제도의 측면에서 낙태를 살펴보기도 하며 (인권과 보건의료의 관점에서 본 임신중지, 윤정원),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에 의해 기본권이 제한받는 문제 (낙태와 헌법 논쟁, 최현정), 신앙과 윤리의 수준 아닌 여성 통제의 수단으로서의 종교계 낙태처벌 주장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인가 명령인가, 나영), 낙태를 범죄화하는 사회적 조건들의 문제점 (낙태의 범죄화와 가족계획 정책의 그림자, 류민희) 등 낙태죄가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이야기했다면, 김선혜의 「섹스 없는 임신, 임신 없는 출산」, 조미경의 「수용시설에 감금된 성과 재생산 권리」, 황지성의 「건강한 국가와 우생학적 신체들」, 박종주의 「재생산 담론과 퀴어한 몸들」 등 중반 이후의 글들은 재생산권 문제의 스펙트럼을 보다 다양한 각도와 층위에서 조망하려는 것 같았다.      


때문에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나온 뒤로 이전에 미뤄뒀던 다른 감상들이 다시 소환되며 『배틀 그라운드』 의 여러 주장들이 생각났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부터 마치 ‘낙태’라는 실밥 하나를 집어내려다 올올이 다 풀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임신에서 출산 그리고 양육으로 이어지는 재생산 (중지/불능)과 관련하여 백만 가지 문제들이 마구 엉켰더랬는데, 오랜만에 책을 다시 펴드니, 중간쯤부터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헤쳐지는 기분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국무장관 인준 청문회에서 낙태는 ‘안전하고 합법적이고 드물어야 (safe, legal, and rare) 한다’고 했다고 한다. 이제 안전한 낙태를 법으로 보장하기 위한 작업들이 진행될 것인데, ‘드문’ 낙태는 당연히 임신과 출산을 소망하는 모두에게 폭력이나 차별 없는 임신과 출산, 양육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이뤄지는 환경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와 관련한 질문들: 

그럼에도 새롭게 탄생한 생명체들은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해 하는 마음이 정말 종족보존의 본능일까; 이런 마음은 자연임신이 가능한 신체건강 이성애자에게만 허용되어야 할까; 법과 의학은 재생산하는 몸의 건강을 어떻게 공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까; 재생산은 여성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한가; 다시 질문하면, 여성의 몸 밖에서 재생산한다면; 다른 이의 몸에게 재생산을 부탁한다면; AI같은 비인간에게 재생산을 맡긴다면. 이런 질문은 불경스럽고 불온한가. 재생산을 위해 재생산된 삶이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구식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낙태 비범죄화를 지지하면서도 내 자녀이든 남의 자녀이든 태어나는 생명은 모두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다들 태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태어난 세상이 행복하지 않아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임신하지 않도록 그리고 임신을 그치도록 하는 것도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덜 불행해지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임신을 중단하려는 이유도 많겠지만 새로운 생명을 낳고자 하는 마음도 그 소망의 크기만큼 너무 다양하다. 누군가에게  “너는 임신하면 안돼. 어쩌려고 그래.” 또는 “네가 어떻게 부모가 되려고 그래?” 하는 걱정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를까? 지구와 나라의 저출산을 걱정하는 저 거룩한 애국심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금지할 수 있을까? ‘정상’ 가족에게만 허락되는 재생산권에서 제외되어 부모가 되기를 금지 당하는 몸들. 누구에게는 낙태를 불허하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부모가 되려는 소망을 외면하고 낙태를 종용하거나 임신과 육아를 불허하는 법, 국가, 사회(라고 쓰지만 정작은 너무 다수인 우리)가 좀 못나 보인다. 좋은 부모가 되고 훌륭한 자식이 될 가능성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판단에 앞서 모두가 좋은 부모이며 행복한 자녀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임신과 출산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모든’ 국민이 임신과 출산을 축하도 격려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당연하다 넘어갔던 현실들이 『배틀 그라운드』 안에서는 모두 문제적이었다. 조미경(수용시설에 감금된 성과 재생산 권리)과 황지성(건강한 국가와 우생학적 신체들)은 국가와 사회가 재생산을 불허하는 몸들에 대해 얘기했다. “국가는 수용시설 정책을 통해 시민을 이분화하고,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이들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넘어, 이들의 성과 재생산 권리를 통제해 왔다. 이는 낙태를 범죄화해 마치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모두 보호해야 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도, ‘태어나지 말아야 할 생명’을 미리 선별하고 있는 국가의 모순된 생명 정치하고도 직결된다.” (조미경, 202) 한센병 환자들이나 부랑인 등 치료나 보호를 위해서라기보다 사회로부터 격리를 목적으로 시설에 수용됐던 시설 거주인들은 가혹한 폭력과 차별을 받았고 동의 없이 거세와 불임이라는 재생산 불능의 시술을 당했다고 한다.      

“요컨대 ‘불능’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특히 법률상 ‘장애인’으로 귀속되는-에게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한 문제이다.”
(황지성, 240)     


그리고 사실 우리는 주변의 소수자들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하고 인정한다고는 했지만, 이들의 재생산권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비정상’의 낙인을 찍었던 것은 아닐까? “결론적으로, ‘비정상’ 신체라는 범주는 미리 정해져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 안에서 모순적 방식으로 끊임없이 증식하는 것이고, 그 과정의 억압과 폭력의 수행이 열등한 신체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는 것이다.” (황지성, 236-237 ) 장애있는 몸, 성적 소수자들, 이주자들과 국적이 다른 이들 등 ‘비정상’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다. 아니 우리 모두 남들 보기에 정상 아닌 것 하나씩은 갖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보다 많은 몸들을  ‘비정상’이라 부르며 이들의 재생산권을 상상하지 못했고, ‘비정상’인 이들의 재생산 능력을 박탈하는 불능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남성과 비-남성, 백인종과 비-백인종, 장애인과 바-장애인,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 등 인간의 신체적 차이를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하는 틀은 모두 근대 세계에 이르러 인간에게 요구하는 생산성/규범에 따라 ‘발명’된 것이다. 이렇게 발명된 이분법과 타자의 몸(의 생산성)은 근대 헤게모니인 남성 중심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주의 및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황지성, 237)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부모가 될 때, 이 모든 누구들이 배제되지 않을 방법 또는 누군가와 누군가가 연결되는 재생산의 방식이 보다 진보한 의학과 법제도 속에서 열려있는 상상을 해본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과거의 이성애 성관계를 통한 ‘자연임신’의 시대를
낭만화하는 것은 현재의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점이다.”
(김선혜, 「섹스 없는 임신, 임신 없는 출산」, 189)     


과거의 방식이 ‘모두’에게 행복한 재생산 방식이 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질문: 앞으로의 재생산 방식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가 건재하는 한, 의료와 법제도가 시장의 논리를 초월하지 못하는 한, 나와 당신의 의지나 도덕적 판단과 상관없이, 나와 당신의 상상을 초월한 방식이 등장할 것이다. 동시에 여성의 몸 역시 재생산 수단으로 계속 남을 것이며 과거의 방식도 유지되고 또 응용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질문 배틀은 계속된다.   



박혜란 "아무 리뷰"

아무 리뷰는 분야와 장르를 상관하지 않고 저자의 의도나 출판사의 방향과 상관없이 편안하게 읽은 감상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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