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좋은 것을 혼자만 하면 안 되기에
서른아홉을 목전에 두고 눈 내리던 12월에 결혼을 했다. 허니문으로 아이가 생겼고,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초기엔 입덧으로 후기엔 불면으로 힘들었던 10개월을 보내고 낳은 아이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예뻤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해안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처럼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극심한 통증의 유선염이 찾아왔고, 2시간마다 엄마 젖을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틀린 적이 없다는 옛말’을 향해 종종 화가 났다. 나는 아이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는데, 낳기만 하면 아이는 알아서 큰다고? 젖몸살이 이렇게나 끔찍한데 ‘젖만 물리면 자니 수월했다’고? 수없이 들어온 말 중에 맞는 말이 없었다.
아이가 왜 이렇게 우는지, 뭐가 불편한지.. 배운 적 없고, 아는 지식도 없는 육아를 퇴근도 없고, 주말도 없이 하는 동안 나는 점점 아래로 침 참해 갔고 이전에 맺었던 많은 관계로부터 소외되어가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어렵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던 신생아 육아의 시기를 두 번 지나고 둘째 아이의 수유가 끝나 누군가와 밥 한 끼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을 때, 마침 함께 밥을 먹고 싶었던 사람이 페이스북에 시모임 공지를 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독서모임은 사실 ‘그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임의 기획자가 좋아서 그이를 만나고 싶어서 그이가 기획한 첫 모임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詩
세수도 못하고, 보풀이 무성한 추리닝도 갈아입지 못한 채 병원을 가고 시장을 가는 정신없는 육아 일상. 책은커녕 글 한 줄도 온전히 읽을 여유가 없어 책장 입구에 쌓인 책들이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필요가 절실한 육아서적도 읽지 못하고 지나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詩라니.. 이 와중에 詩라니.. 지난 몇 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장르였다.
혼자서는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니 당연히 못 느꼈을 테지만 혼자 읽었다한들 이런 감동과 재미를 느꼈을까? 함께 시를 낭독하고 소감을 나누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시를 읽다가 ‘툭’하고 눈물샘이 터지고, 시어 하나에 전등이 ‘반짝’하며 켜지듯 새롭게 놀라고, 사춘기 소녀로 돌아간 듯 깔깔 웃어대며 시 한 편에 수다 한 다스를 털어놓고도 못다 한 수다가 아쉬워 다음 시간을 기약하는 재미를 알았을까!! 너무 재밌어 그 ‘재미’가 아까운, 이 즐거움을 다른 무엇을 통해 느낄 수 있었을까? 그토록 많은 시를 배우고, 외우고 시험까지 봤지만 누가 내게 시를 읽는 게 이렇게 재밌고 행복한 일이라고 알려주었었나? 지난주에 시를 낭독하다 목이 메어버린 그 언니랑, 엉뚱한 시 읽기(해석)으로 우리 모두를 박장대소하게 했던 그 언니랑 또 같이 이야기를 나눌 기대에 시집의 첫 장을 여는 마음이 이렇게나 설레건만, 이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시’에 대한 나의 경험과 정의는 학창 시절 교실로 국한되어 무지 재미없게 내 인생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독서모임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만난 또 다른 독서모임.
여자로 태어나 40년이 넘게 여자로 살아오면서도 ‘날씬하다’, ‘예쁘다’는 기준을 벗어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여자의 몸에 대한 생각. 서른아홉에 첫 출산으로 겪었던 엄청난 몸의 변화.. 두 번의 출산과 수유로 이전에 상상해보지 못했던 몸의 변화를 겪으면서 내 몸, 그러니까 여자의 몸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는데 마침 땡땡책 조합원의 포스팅에서 ‘록산 게이의 헝거를 함께 읽자’는 공지를 보았다. 한 달에 한번, 주말 낮 모임이라는 모임 시간도 내게 적합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잠시 망설여졌지만 내 몸에 대한 서사를 한 번은 정리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헝거를 읽으며 각자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몸에 대한 이야기는 수치심, 억압, 비밀, 해방, 기쁨 등등의 감정이 만들어진 단초들을 엮어내는 것이었고 결국 한 사람의 구체적인 생의 역사였다. 생리를 시작하고, 가슴에 몽울이 생기기 시작하며 내 몸이 여성의 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나에게 날아왔던, 내 몸에 대한 성적인 언어들..
내 몸에 관한 기억들을 길어 올리고, 퍼즐을 맞추듯 지난 경험과 그 경험들이 낳은 감정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수도 없이, ‘나는 왜 그때 그 탐욕, 때론 비아냥거림, 자존감을 해치는 간섭, 나를 가두는 불편한 시선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했을까? 왜 나를 그냥 방치하며 그 화살(말)을 그냥 받게 두었을까? 왜 내 편에서 내 감정을 살펴주지 않았을까? 남의 상처는 그렇게 살뜰히 보살피면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내 상처는 못 본 척 모른 척했을까?’ 자책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으로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다 결국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가부장 사회의 구조, 남성 중심의 위계와 권력, 개별화된 개인의 나약함을 깨닫고 비소로 나와 어느 정도 화해할 수 있었다.
책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읽는 방법론을 배우기도 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기도 하고, 진심 어린 위로를 받기도 하고, 마음을 가서 닿는 공감을 하기도 한다. 그건 분명 큰 기쁨이고 활력이며 힘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그건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용기를 주고 열린 자세로 경청해주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질문하는 사람에게 답을 요구하는 사회, 자신과 다른 의견에는 날 선 공격이 가차 없이 들어오는 사회, 무시하고 혐오하고 저주하는 사회에서 앎이 부족한 사람, 마침표가 찍힌 문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말할 자격을 갖지 못한다. 완벽한 지식과 발언권이 동의어로 쓰이는 세상에서 독서모임은, "내가 지금 알을 깨고 나가려고 해요" "이제 균열을 내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좀 혼란스러워요”. “지금 알을 깨고 나왔어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나는 지금 알았어요. 앞으로 더 많이 배우고 익힐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부족한 나를 부족한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고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열망과 노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책의 저자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로부터 더 나은 생각들을 듣고 따라갈 수 있는 시간이었고, 다듬어진 언어들로 나의 의식을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더 나은 내가 되기를 희망하며 그렇게 될 수 있게 노력할 수 있는 '과정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나와 함께 그 과정의 시간을 보낸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카오스처럼 흩어져 헤매던 내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고 나의 호불호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었으며 혼자서는 차마 열어보지 못했던 내 상처들도 용기 내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나에게 그런 시간을, 공간을, 감각을 갖게 해 주어 감사하다"라고 인사하고 싶다.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적극적으로 독서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참 좋은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참 좋을 시간일 것이기에..
땡땡책의 가입 안내서에도 나와있듯이, '이 좋은 것을 혼자 하면 안 돼'겠기에 이 글을 쓴다. 혹시 지금 ‘독서모임에 한번 나가 볼까?’ 생각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망설이지 말고 손을 들고 댓글을 달길 바란다. 어쩌면 당신이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소소한 재미들이, 박장대소할 즐거움이, 따듯한 환대가, 등을 두드려주는 격려가, 어린아이처럼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가, 당신의 질문을 함께 고민해주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함께 정리해 줄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쓴이 : 허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