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지독한 디렉터스 컷을 기다리다
2015년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 물론 다소 과감한 진단이다.
영화에서 ‘리부트reboot’란 기존 시리즈의 연속성을 버리고
몇몇 기본적인 설정들을 유지하면서 작품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47쪽
중요한 것은 늘 다시 나온다. 다시 만들고 다시 듣고 보고 다시 수익을 낸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하면서도 늘 같지만 다른 무엇을 기대한다. 세상이 많이 변한 줄 알았지만 여전하다. 페미니즘의 의제들도 여전하다. 성의 해방을 주장했지만 섹슈얼리티 앞에서 여성은 여전히 전혀 안전하지 않다. 식민지 시절 성노예문제는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인 지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노동은 여전히 여성 친화적이지 못하다. 현실정치와 입법제도는? 업로드와 다운로드, 좋아요 누르기와 공유하기 덕분에 급속히 전파되는 정보와 소문은 우리의 인식과 태도에 어마어마한 변화의 데이터를 가져다줬지만, 여전히 시스템 정비 중인 현실은 고화질로 더욱 적나라하게 전달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함을 구경하며 이렇다 할 스승 없고 토론의 동지도 없이 페미니즘을 혼자 글로 읽고 생활로 느끼기만 하던 올드 스쿨 페미니스트에게 『페미니즘 리부트』는 부럽고 설레는 감탄의 시작이었다. 공감과 반박으로 우리와 그들을 횡단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웅성대는 페미니즘 현장을 기록하면서, 다시 부팅된 페미니즘의 무대가 다름 아닌 익명의 불특정 다수들의 일상이자 대중문화였다. 모두가 한 사람의 대중이라 생각했지만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청년실업 문제나 노동과 임금의 문제를 보면 청년이나 노동자는 은연중에 남성으로 젠더화되어 논의한다.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모두가 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여전한 것들을 지적하고 성가시게 했다.
헬조선과 수저론, 그리고 리셋의 상상력은
더 이상 먹고살 수 없게 된 청년세대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빈곤한 청년의 얼굴은 남성으로만 상상되었다.
20-30대 여성들이 들고 나온 페미니즘은
여성 청년의 목소리가 누락되었던 헬조선 담론에
여성 젠더를 기입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리부트’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실패로부터 등장한 것이었으며,
정확하게는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판타지의 실패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 같은 책, 86쪽
헌옷을 꺼내 조각보에 덧대본다. 호머의 오딧세이에 나온 가정 로맨스부터 시작한다: 모두가 잠든 밤 페넬로페는 하루치 베틀의 수고를 남모르게 잘라버린다. 베짜기를 마치면 수의는 완성되고 몸은 겁탈당하고 상속은 박탈당할 것이다. 모두의 첫사랑을 구하러 떠난 사나이들의 원정은 여전하고 왕비는 어린 여성에서 어머니 여성으로 건너뛴다. 왕비는 장물이고 담보가 되었다. 아버지 부재의 왕자는 어리고 불안하다. 궁정은 권력을 잡으려 왕비의 섹슈얼리티를 탐하는 자들로 북적인다. 20년 만에 귀환한 왕, 율리시즈. 왕비의 구애자들은 무릎 꿇었고 구애자들과 협상했던 궁정의 여인들은 모두 참수당했다. 이제 늙은 왕과 왕비, 장성한 왕자는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고, 훗날 연인들의 수호자였던 한 성자는 갓 태어난 중세 기독교도 여성들에게 왕비의 이름을 주었다.
훗날의 페넬로페들은 모범적 시민을 생산하고 양육하여 사회로 배출하는 집안의 천사가 되려 했으나 계몽의 교육은 이들을 문명을 향해 건넜던 험한 사가소 바다를 그리워하는 다락방의 미친년들로 키웠다. 임파워먼트empowerment, 힘갖추기 또는 역량강화 아니면 세력화를 모색하며 홀로 또는 함께 힘을 다해 아르고호에 탑승했지만 제국을 향한 배에 오른 자신은 그저 포카혼타스처럼 식민지 원주민이었을 뿐이다. 더구나 왕비도 공주도 아니었다. 다행히 식민지는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내전 아닌 내전 같은 내전 아닌 전쟁에 시달렸고 종전 아닌 종전 같은 종전 아닌 휴전이 계속되고 민주주의 아닌 민주주의 같은 민주주의 아닌 독재 속에 공화국은 광장과 시장이 이웃하고 참여는 송금과 구매로 표현했다. 이들은 여성을 넘어 보다 보편적인 어떤 존재가 되고자 했고 여성다움 아닌 사람다움을 외쳤지만, ‘인간다움humanity’을 회복하려는 시대의 분투는 합리를 놓쳤고 그 와중에 여자는 사람에 묻혔다. 우리의 혁명이지 나의 혁명은 아니었다. 당연하다 생각했다. “나를 춤추게 하지 못하는 혁명이라면 하지 않겠다”는 엠마 골드먼의 명언은, 혁명과 투쟁의 전쟁터를 놀이터 삼아 놀고 싶었던 이십 대에 마침표를 찍으며 남의 잔치의 종지부를 노래했던 한 시인과 시인의 또래들이 마흔을 한참 넘긴 다음에야 익숙해졌다.
시인이 미리 알고 있던 것들은 사실이었다. 지갑 챙겨 계산 마치고 떠난 이들 대신 남아 상을 치우는 주인 아닌 이들, 기억하고 눈물 흘리는 이들, 이들은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불렀다. 그가 부르다 만 노래의 전체는 무엇이고 마저 고쳐 부른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1994년 시인은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 했지만 2015년 이후 고쳐 부른 노래들은 대단히 상관있었다. 이들은 시끄러운 소음과 분노로 원곡을 뒤집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불화하는 언어들에 세상은 [누구의 세상인가?] 귀찮은 듯했다. 나 같은 올드 스쿨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세계에 궁금하고 설레고 솔깃했다. 더 이상은 가족 로맨스로 이어진 신화와 전설의 알레고리가 될 수 없는 새로운 움직임들. 혹은 지금과 여기에 관한 페미니즘 문화비평.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제목은 영화 전공자인 저자가 다시 시동걸기(rebooting) 작업을 영화 용어에서 가져와 대중문화를 진단하는 페미니스트임을 확인하는 선언적 서지명이라 읽히기도 한다. 리부트의 의미가 “기존의 브랜드 가치와 팬덤에 기대어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라면, 페미니즘 리부트는 페미니즘이라는 브랜드의 기존의 가치와 팬덤에 기대어 2015년 촉발된 일련의 사건과 행동들을 통해 변화된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지금 여기’를 진단하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낭만적 상상만으로는 풀 수 없고, 청년실업 인구는 다양한 성정체성으로 존재한다. 여성혐오로 대동단결하는 가부장제 남성 공동체가 지닌 감정의 인클로저, 문제적 정동으로서의 혐오를 분석하고, 젠더전戰 현상을 짚어가며 반지성적 남성 지식인(과연 지식인인가?)들의 아무말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처럼 이미 나온 여성의 목소리들을 다시 부각시킨다. 사랑과 공존의 쉬운 결말을 버리고 이 사회의 온갖 가부장제들에 시비를 거는 부상하는 목소리들도 수집하여 온전히 전하려는 노력도 놓지 않는다.
『페미니즘 리부트』에는 우리 일상과 대중문화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들, 예능 방송들, 온라인 커뮤니티들, 유행어들, 페미니즘의 새로운 현상들을 다루고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저자가 이 책에서 하고 있는 페미니즘 문화비평의 쓸모에 관한 부분이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을 분석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조각보처럼 구성되는 페미니스트 담론’에 대한 상상력”을 제안한다.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언어로서의 비평을 제안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저자는 영화가 드러낸 재현의 윤리를 비판하는 비평을 조심스레 [그렇지만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비평의 한계를 지적하는 또 다른 비평의 가능성과 기능을 상상한다. 그리고 “페미니즘 비평은 한 편의 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참조와 생산적인 비판 가운데서 담론을 풍부하게 확장시켜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는다.”(249쪽) 대중=남성으로 젠더화된 문화를 감상하면서 부대끼고 불편한 지점들을 들추고 그 성격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이라는 천조각들이 모여 서로에 구멍을 내고 실을 꿰어 스스로 전체이지만 서로에게 일부가 되어주어 또 다른 전체를 완성해가는 말하기/글쓰기를 제안한다.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유창하게 말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즘 언어의 용어들을 정의하고 설명하고, 지금 여기에 대한 어떠한 오독도 불허하며 있는 그대로 말하려 하기 때문에 한국의 지금 여기에 대한 최신 정보에 어둡거나 최근의 페미니즘 용어들이 낯설다면 [나 같은 독자라면] 전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간략히 나의 감상을 요약하자면, 이 책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물리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졌던 폭력적 사건들이 지닌 감정의 구조를 추적하고, 한국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비평을 통해 여전한 한국 사회를 읽어내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제시한다. 더 이상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 저자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장전하고 문화비평이라는 격전지에 뛰어들었다. 페미니즘의 문제가 별도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과 고용, 실업, 보육을 포함한 교육과 복지, 건강과 의료, 인구 재생산, 폭력과 범죄, 정치, 예술, 문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 속에 개인은 다양한 입장으로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이 모든 의제들에 개입한다. 젠더화된 모든 현장에 대한 전방위 비판의 과녁에는 교육받은 386세대 남성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저자가 87년 체제라고 한 서른 즈음의 잔치를 마친 세대들. 이 땅에 민주주의를 가져왔다고 자부하지만 스스로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따라가지 못하는 세대들. 그럼에도 가르칠 연배가 되었다 생각하고, 현실정치 중심의 주변에서 배회하고, 방송과 언론의 헤게모니를 안 뺏기려는 민주주의와 상관없는 가부장제의 포부를 여전히 놓지 못하는 이들. 세상은 여전히 바뀌어야 할 것들이 많다. 일단 나도 너도 아닌 3인칭의 존재를 젠더중립gender neutral의 그로 퉁쳤던 우리 모[?]국어에 젠더특성gender specific의 대명사도 필요한 듯하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 있겠느냐며 성가시고 귀찮아 알고 싶어 하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혹시 나올지도 모를 『페미니즘 리부트』의 디렉터스컷은 보다 지독해지기 바란다.
박혜란 "아무 리뷰"
아무 리뷰는 분야와 장르를 상관하지 않고 저자의 의도나 출판사의 방향과 상관없이 편안하게 읽은 감상을 소개합니다.
책
페미니즘 리부트 | 손희정 지음 | 나무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