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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Oct 26. 2017

10년 만에 다시 꺼내 보는
<세계의 비참>

어느 지역활동가의 ‘내가 나에게 시비 거는 책읽기’

농사 중에 도박 같은 농사가 있으니, 바로 인삼농사다.

보통의 작물들이 1년을 넘지 않고 수확을 하니 망해도 길어야 1년, 대개는 계절농사 정도만 망하기 때문에 다음 농사에 힘을 쏟으면 되지만 인삼농사는 길면 6년, 짧아도 4년 이상은 기다려야 하니 한번 실패하면 몇 년의 노력이 사라지는 셈이 된다.

그래서 인삼농사는 더 많은 자본과 노동력을 들이부어야 한다. 농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땅도 자신이 가진 지력을 몽땅 빼앗길 정도로 인삼농사는 사람에게도 땅에게도 도박이며 주변의 것들을 황폐화시킨다.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인삼농사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 부었지만, 그렇게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관계된 사람들을 쥐어짜서 살아가게 되는 이 활동가라는 삶. 단기간 어떤 목표나 성과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런 성과들이 있기나 한 것인지 하는 무기력에 빠지기 쉬운 것이 활동가의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럭저럭 활동가로 살아온 지 20년이 넘었다. 워낙 한 가지로 구분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지만 대략 마을 혹은 지역을 중심으로 대안의 삶들을 모색하는 활동에 집중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 부어 지내온 지금까지의 내 삶과 활동은 과연 어떤 꿈과 지향들을 가지고 있으며, 과연 내가 도달할 미래는 어떤 것일까?     


불현듯 내가 좋아했던 책들을 통해서 이런 “나”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정리해보고 싶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해야 하거나 가야 할 어떤 일과 대상을 정할 때 “희망”이라는 카테고리보다는 “절망/암울”의 카테고리 속에서 움직이는 편이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 것 같다기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이 좀 더 일을 하게 되는 추진력이 되던 시간들이었다.     


아마도 동네의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였다. 당시 공부방 교사활동과 진보정당운동 혹은 지역노동운동에 대한 연대활동을 주로 해오던 나로서는 1997년 이후 가속화하는 가족해체와 빈곤의 증대, 그 속에서 어떤 길도 보여줄 수 없는 교사로서의 암울함이 겹쳐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하루 아이들과 싸우듯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기보다는 앞으로의 삶들이 어쩌면 더 붕괴되고 몰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암울함이랄까?


아이들에게 하루하루 버티다보면 좀 더 나은 미래가 온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아이들 스스로 뻔한 미래와 뻔한 삶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 체념을 걷어내주기 힘든 사회를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어쩌면 더 이상 교육을 한다는 것에 믿음 따위를 갖기 힘들지 않을까 싶어지는 나날이었다.     



세계의 비참은 피에르 부르디외 등 22명의 사회학자들이 3년 동안 작업한 연구 결과물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 그러니까 대규모 공영주택 단지, 학교, 사회복지시설, 노동자 빈곤가정, 사무직원, 농부 그리고 가정이라는 세계 속에서 비참한 사회적 산물들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생산되고 또 삶 속에 지속적으로 재현되는지를 이해하고자 한 연구다.

각각의 인터뷰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이 어떻게 각자의 삶 속에서 고통을 겪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비참함 속으로 몰아가게 되는지에 대한 세밀한 지도를 그려주는 책이랄까?     


나에게 이 책이 보여준 성과는 관점들의 공간, 장소의 효과, 국가의 직무유기라는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고통은 점점 더 증가하는 반면에 대안의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져간다는 것을 매우 날카롭게 드러낸다는 암울함이었다.     


내가 지역이나 마을이라는 좀 더 구체화된 생활공간에 좀 더 집중해보고자 했던 것은 이런 암울함에 짓눌려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공포감이랄까, 이것이 내가 살아갈 미래라면 조금이나마 이 암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만의 공간들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청주의 지속가능발전협의회 활동 이후 “좀 더 마을로! 좀 더 지역으로!”, 그렇지만 그 생활 속에서 “좀 더 이데올로기적으로”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되뇌게 되는 것 또한, 이 책이 보여주는 도래한 미래에 대한 공포감에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는 편이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왜 이 책을 다시 꺼내 보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고통의 증가와 대안의 희박성에서 과연 벗어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점점 더 고사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인지 궁금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10여 년의 활동 후에 도달한 미래라는 것이 결국은 어떤 것도 얻지 못한 무용한 활동이지 않았을까 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온 마을만들기 혹은 마을운동은 과연 한국 사회를 어느 만큼 견인해왔을까?

그러니까 초기 마을활동가들이 지향했던 사회로, 한국의 마을들은 얼마만큼 견인되어왔을까?

이런 질문에 우리는 얼마나 당당하게 자기 소신을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박영길

어느 지역 활동가의 '내가 나에게 시비 거는 책읽기'




세계의 비참 |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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