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 공기는 종종 경제적 이유로 무거웠다. 성실한 부모님이었지만, 가끔 집 안 공기는 알 수 없는 중력으로 가득했다. 일찍 철든 아이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부모님의 무력감을 느낀다. 작은 홍시가 쉽게 물러지듯 말이다.
감정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기엔 어렸던 나는, 집안을 누르는 공기를 유난히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 공기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과 멋지게 해결할 수도 없다는 무력감이 뒤섞여 있었다. 나의 고민 어린 눈빛이 한층 깊어가는 만큼 집엔 엄마의 커피믹스 빈 봉지가 쌓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잔.
점심밥 솥 올리기 전 또 한 잔.
저녁밥 쌀 씻기 전 마지막 한 잔.
철없던 나는 그게 못마땅했다. 없는 형편에 건강에 좋지도 않은 커피믹스를 왜 그렇게 마시냐며. 머리가 좀 더 크고 나서 커피만큼은 아끼지 않는 엄마를 나무라기도 했다.
그럼 엄마는 ‘이걸 마셔야 힘이 난다’며 눈을 찡긋하고 웃고는, 커피 잔을 휘휘 돌려 입안에 커피를 털어 넣고 다시 고무장갑을 꼈다. 나는 뒤돌아서, 어쩌면 가끔 건방진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르겠다.
좀 더 자라 내가 번 돈으로 혼자 아메리카노를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즈음.
피곤한 저녁 알바를 마치면 친구들과 달달한 디저트와 카페 라테를 마시는 게 낙이 되었을 그때 즈음 언젠가.
막차를 타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느 날, 오래된 동네 슈퍼 앞에 쌓여있던 커피 믹스를 보았다.
이른 아침, 커피 물 끓이던 소리와 어린 엄마 생각이 났다. 그때 내 나이보다 두 세살 어렸을 엄마가.
나처럼 달콤한 디저트와 향긋한 커피가 좋았을 그때의 젊은 엄마에게.
먹이고 입혀야 할 입이 많았던 바쁜 하루 속 주어진 달달한 커피 믹스 한 봉지가 이해되던 날이었다.
등교하는 현관 운동화 끈 묶을 때 코끝에 남던 고소한 커피 향과 달콤한 설탕 냄새.
어디에 터놓기도 외로운 말들과 함께 삼키면 금방 에너지를 주던 그 한 봉지는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
엄마는 이걸 마셔야 힘이 난다고 나에게 그토록 말했었는데.
어린 자식은 불편하게 하는 환경만 보였다.
엄마의 소박하고 사치스러웠을 커피 믹스에 어린 자식의 눈치마저 더 해지진 않았을까.
어린 자식의 설 익은 걱정이 아프진 않았을까.
이번 추석, 넌지시 이야기를 하자 엄마는 “나는 너희 키울 때가 제일 재밌었어.”라며 맑게 웃는다.
이제는 집 한구석, 존재감 없이 놓인 커피믹스 상자엔 씩씩했던 젊은 엄마와 어린 나의 걱정이 함께 있다.
나도 엄마와 웃으며 커피믹스를 함께 즐길 줄 아는 어른이 되었는데, 나이 든 엄마에겐 당뇨란 또 다른 눈치거리가 생겼다.
“그래도 엄마 정도면 건강한 거야”
내가 사 온 파운드케이크에 콜드브루 커피를 마시며 엄마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다. 시나몬 향 가득한 케이크와 쌉쌀한 커피 한 모금에 엄마와 대화를 더하면 삶의 고독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젊은 엄마보단 커피 믹스를 덜 마시는 걸까. 지금도 어린 나의 여백이 있는 걸까. 하지만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작은 사치가 되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