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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씨앗

by 박요한

압축된 땅

52.893 평방미터. 초록색 벽지로 둘러싸인 16평 남짓한 공간. 그 안에서 16명의 남녀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처음엔 규칙적이던 움직임이 점차 음악소리가 커질수록 분주해졌다. 발소리는 마치 재활용 압축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둔탁하고 기계적이다.

음악이 잦아들며 사람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하나둘씩 사라지는 사람들. 공간에 남은 것은 압축기 소리와 무리 속에 있던 한 남자, 그리고 그의 주변에 흩어진 여러 종류의 씨앗들뿐이다.

“딸칵.”

“지이잉.”

압축기가 열리며 네모난 종이 박스가 기지개를 켜듯 반짝인다. 아침이 오는 것을 반기는 것처럼.

남동공단 깊숙한 어느 곳. ‘철거금지’ 표지판이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79 제곱미터의 좁디좁은 공간. 딱 압축기 하나 들어갈 만한 이곳은 어머니와 내가 살아가는 세계였다.

“딸칵.”

“지이잉.”

멀리 보였던 새빨간 ‘철거’ 글자가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ㄹ’이 먼저 보인다. 빨간색은 언제나 침입자의 색이었다.

“딸칵.”

“딸칵.”

“야이 씨발것들아!”

어머니의 고함이 공간을 울렸다. 그들은 우리를 ‘씨발것’이라 부른다. 이 공단에서 유일하게 남은, 고집 센 씨발것들. 어머니도 그들을 ‘씨발것들’이라 부른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씨발것이었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 이 땅은 우리 세 가족의 소우주였다. 낡은 압축기와 기계의 소음 속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재활용 기계 옆에 앉혀놓고 말했다.

“이 기계는 마법이야.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도, 이 안을 지나면 새로 태어날 수 있어.”

어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를 따라 기계를 조작하곤 했다. 압축기에서 나온 네모난 박스를 보며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이 박스처럼 될 거야. 네가 얼마나 멋진 모습으로 변할지 엄마는 항상 기대하고 있어.”

가끔 아버지는 허름한 트럭에 재활용품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그는 종이박스 더미 위에 앉아 내게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너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너만의 보물을 찾게 될 거야. 꼭 기억해라, 더럽고 낡아 보여도 그 안엔 새 생명이 숨어 있다는 거.”

어느 비 오는 날, 우리는 좁은 공간에서 함께 앉아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밖에서 들려오던 빗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난 뒤, 모든 것이 변했다. 나는 자라면서 이곳이 나를 옭아매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재활용 기계 곁에서 새로운 생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내겐 그 말이 허무하게만 들렸다.

어느 날, 빨간 글자를 단 사람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돈을 주겠다며 이 땅을 포기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단호히 거절했다.

“우린 여기서 떠날 수 없어요. 이 땅은 우리 가족의 모든 걸 담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마음속 깊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공단은 점점 텅 비어갔고, 이 좁은 공간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그날 밤, 어머니와 나는 처음으로 크게 다퉜다.

“엄마, 제발 팔고 나가자. 여기서 더 버틸 이유가 없어.”

“이 땅이 네 아버지의 유산이야. 우리가 떠나면 아버지가 남긴 건 아무것도 없잖아.”

“유산?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이 기계랑 박스가 우리 인생을 바꿔줬어? 아니잖아!”

어머니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말했다.

“네가 이해 못 해도 좋아. 하지만 나는 여기서 죽을 거야. 네 아버지가 남긴 이곳에서.“

철거가 임박한 날, 어머니는 재활용 기계 앞에서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오래된 사진첩, 아버지가 남긴 서류들, 그리고 내가 몰래 서명했던 계약서. 모든 것이 검게 타들어갔다.

“엄마, 그만해.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아.”

“달라지지 않아도, 난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을 거야.”

그 순간, 빨간 글자를 단 사람들이 철거 도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들을 피해 기계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재활용 기계가 멈추려했지만 그녀를 빼낼 방법은 없었다.

“딸칵.”

“지이잉.”

어머니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그 기계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딸칵”

“지이잉”

기계에서 나온 것은 네모난 종이 박스 한 상자뿐이었다. 그 안에는 빨간 씨앗들이 가득했다. 빨간 글자가 사라진 빈 공단 한가운데, 나는 그 씨앗을 뿌렸다.

빨간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빨간 새싹이 자라났다.

빨간 씨앗이 땅 속에서 꿈틀대는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간의 결이 지각을 비틀며 깨어나는 듯했다. 땅 속에 숨어 있던 씨앗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백 개의 기억과 억눌린 감정, 그리고 한 가족이 흘린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존재였다.

첫 번째 새싹이 땅 위로 올라온 순간부터, 공단의 공기는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다. 새싹은 낮에는 평범한 식물처럼 보였지만, 밤이 되면 붉은 잎이 은은히 빛났다. 그것은 마치 별빛을 땅 위로 내려오게 한 것처럼 신비로웠다.

처음엔 작은 잎사귀였던 것이 곧 덩굴로 변하더니, 새벽녘에는 공단의 건물 외벽을 타고 뻗어나갔다. 벽돌과 쇠파이프를 휘감은 덩굴은 마치 그것을 녹여 자신의 일부로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덩굴이 지나간 자리에는 붉은 흔적이 남았다.

가끔 덩굴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공단 전체에서 어딘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어머니가 생전에 기계를 작동시키며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이 나무와 연결된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무의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려갈수록, 내 머릿속에는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비 오는 날 라면을 끓여 먹던 순간, 아버지가 웃으며 말하던 “더러워도 새 생명은 가능하다”는 말들.

그러나 그 감각은 단순히 과거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나무의 잎사귀를 만질 때마다 그것이 내게 새로운 감각을 전해주는 것을 느꼈다. 마치 다른 차원에서 온 기억들이 나를 통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철거 회사는 그 나무를 악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것을 베기 위해 초대형 기계들을 공단으로 들여왔다. 거대한 톱날과 화염방사기가 나무를 향해 움직일 때, 땅이 울리며 붉은 덩굴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였다.

덩굴은 기계의 톱날을 감싸며 그것을 부수기 시작했다. 화염방사기로 불을 뿜을 때, 나무의 붉은 잎사귀에서 퍼져 나온 진한 안개가 불꽃을 삼켰다. 공단은 점점 전쟁터로 변해갔다.

그러나 나무는 단순히 자신을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공포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철거 반원들은 잎사귀에 닿기만 해도 과거의 죄악과 억눌린 감정을 환각처럼 보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모습으로 사라져갔다.

몇 주 후, 공단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거대한 나무를 중심으로 한 붉은 숲이 자라났고, 사람들은 그 숲을

“붉은기억의 숲”이라 불렀다.

숲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단순히 길을 잃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아픈 기억과 마주했다. 어떤 이는 숲에서 한참을 울며 자신이 상처 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과 죄를 정면으로 보며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나 나무는 모든 이를 심판하지 않았다. 숲에서 용기를 낸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찾았다.

마치 재활용 기계에 들어갔다 나온것처럼

어느 날, 나는 숲 속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무의 중심부에 다다랐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들 네가 선택할 시간이야. 이 땅은 우리 가족의 기억을 담고 있어. 하지만 너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어. 나를 떠나도 좋고, 여기 남아도 좋아.”

나는 나무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엄마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가 진정 원했던 게 이거야?”

나무의 붉은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씨앗 하나를 떨어뜨렸다. 그것은 빛나고 있었다.

“이 씨앗은 새로운 시작이야. 너의 선택으로 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어.”

나는 그 씨앗을 품에 안고 공단을 떠났다. 몇 년 뒤, 나는 작은 도시의 외곽에서 그 씨앗을 심었다. 그것은 처음엔 조용히 자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곳은 또 하나의 “기억의 숲”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복수를 위한 숲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과거와 화해하고, 새로운 시작을 찾게 해주는 곳이 되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속삭임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무리 더럽고 낡아도, 새 생명은 가능하단다.”

그 숲은 여전히 자라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를 품고,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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