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가장 분주한 공간에, 그는 새벽녘 앉아 있었다.
낮 동안 수천 번의 발자국이 드나드는 자리, 웃음과 대화가 흘러넘치던 그곳에
이제는 오직 한 사람의 숨결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오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누구나 용도를 가지고 오는 이 공간에서
그에게는 아무 용도도 없었다.
그저 버텨내기 위해,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앉아 있었다.
가장 편해야 할 곳이 낯설고 불편해진 지 오래였다.
벽은 너무 가깝고, 창은 너무 멀었다.
그의 몸은 천천히 식어가고, 마음은 조용히 꺼져갔다.
누워볼까, 그는 생각했다.
누운다는 것은 그에게 유일한 평화의 형태였다.
밖에서는 비가 내렸다.
처음엔 가볍게, 이내 무겁게, 마치 오래된 죄를 씻어내려는 듯.
그는 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초록빛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 세상은 다시 살아 있는 듯했다.
그는 그 바람에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끝이 마지막으로 그의 볼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새벽의 공간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오직 의자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 한 올,
그리고 바람에 젖은 한 줌의 따뜻함만이
그가 있었다는 증거처럼, 천천히 식어갔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새벽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축축하게 눅눅했고, 벽지는 바람을 머금은 듯 조금씩 들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새벽, 어쩌면 같은 시간,
그는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눈을 돌리자, 창밖에서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칼, 흐릿한 얼굴.
그는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분명히 그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마치 오래전 그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유리 너머, 여자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그 모양은 분명히 ‘돌려줘’였다.
그 순간, 번개가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여자는 사라졌고
그의 발밑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물 위에는, 낯선 그림자가 떠 있었다.
그림자는 여자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조금씩 변형되어 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는 멈춰 서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창백하게, 무너지는 걸 보며.
그는 깨달았다.
그날, 자신이 이곳에 앉아 있던 이유는 단지 피난이 아니라
‘죽음의 순서가 뒤섞인 공간’ 속에서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던 것임을.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돌려줄게.”
그러자 창문이 스스로 열렸고,
초록빛 바람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엔, 피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젯밤의 비가 아직도 내리는 듯, 방 안 공기는 젖어 있었다.
숨을 들이쉬자, 다른 사람의 기억이 밀려왔다.
낯선 남자의 마지막 눈빛, 여자의 갈라진 숨결,
피에 젖은 손끝의 온기까지 — 그가 아닌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은 분명 자기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서 뛰는 심장은 타인의 리듬으로 고동쳤다.
눈을 감으면 익숙하지 않은 생의 장면들이 밀려들었다.
사람들의 울음, 끊어진 이름들,
그리고 불 꺼진 병실에서 한 여자의 마지막 목소리.
“이제 너야.”
그는 문득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의 죽음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죽음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냉기와 달리, 그것은
온몸을 덮는 이불처럼 느리게 다가왔다.
그는 타인의 폐 속에서 숨을 쉬었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죽어가는 모든 순간마다, 그는 거기 있었다.
칼날이 살결을 가르는 소리, 불길이 살점을 스치는 냄새,
그 모든 감각이 그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죽은 자의 얼굴’로 변했고,
그의 이름은 매번 지워졌다.
이제 그는 한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타인의 마지막을 살아내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대리인이자, 증언자이자,
언제든 자신이 사라질 수 있는 유령이었다.
비가 다시 내렸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초록빛 바람이 또다시 스며들었다.
그 바람 속에는 수천의 숨이 섞여 있었다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의, 혹은 이미 죽은 자들의.
그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엔 비명과 자장가가 동시에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가 목격한 모든 죽음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