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긴어게인

by 박요한


비긴 어게인


마지막 역을 알리는 역장의 목소리가 전철 안을 천천히 울렸다.

마치 오래된 수조 속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소리는 둔하게 번지고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몸을 옮겼다. 가방이 부딪히고, 외투가 스치는 소리들이 짧은 생을 마치고 사라졌다.


그 안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진철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는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피부 위로 드러난 팔과 다리는 온도라는 개념을 잊은 것처럼 고요했다. 마치 이 세계의 계절과는 다른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 같았다.


“종착역입니다.”


기장의 목소리는 분명히 그의 귀에도 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철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허공 너머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딘가, 혹은 이미 사라진 무언가를.


전철 안의 불이 한 번 깜빡였다.

그 순간, 진철의 머릿속에서는 오래된 장면 하나가 천천히 재생되었다.


어릴 적, 비 오는 오후.

젖은 운동화를 신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문득 이유 없이 세상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불안해졌던 기억.


그는 그날 이후로 가끔 이런 상태에 빠지곤 했다.

몸은 여기 있는데, 감각은 다른 쪽에 걸려 있는 상태.

마치 삶이 아닌 삶의 리허설 속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난 뒤에도 전철은 잠시 문을 열어둔 채 멈춰 있었다. 빈 좌석들 사이로 냉기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진철의 팔에 닭살이 돋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끝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끝이라는 이름을 가진 처음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고.


사람의 인생에는 몇 개의 종착역이 있고,

그중 일부는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철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미세하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오며 그를 다시 이 세계에 묶어두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전철은 아무도 태우지 않은 채 천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제야 진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플랫폼 위에 내려서자, 그의 발바닥으로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또렷이 전해졌다.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 않게.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그는 이제야 이해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진철은 가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종착역에서 내렸어.“


그 말 뒤에는 늘 침묵이 따라왔다.

사람들은 그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고, 진철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는 순간, 그곳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는 역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

플랫폼을 나서자마자 바람이 불었고, 가로등 불빛은 어딘가 불완전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간은 분명 흐르고 있었지만, 속도를 잃은 것처럼 느릿했다.


진철은 벤치에 앉았다.

차가운 철제 벤치가 허벅지 아래로 스며들었다. 반바지 차림이 그제야 계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처음으로 추위를 느꼈다. 추위는 살아 있다는 감각과 아주 닮아 있었다.


그때였다.


까마귀 한 마리가 플랫폼 난간 위에 내려앉았다.

검은 깃털은 빛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고, 눈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까마귀는 울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기울인 채 진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만남 같았다.


“너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말은 분명히 전달된 것 같았다. 까마귀는 날개를 한 번 접었다 펼치며 천천히 플랫폼 아래로 내려왔다.


까마귀의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진철의 머릿속에서는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어릴 적, 장례식장 앞.

검은 우산들 사이로 날아오르던 까마귀.

누군가의 끝과 누군가의 시작이 겹쳐 있던 날.


까마귀는 그를 지나쳐 몇 걸음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쪼았다. 그것은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아마도 오래전 전철 부품의 일부였을 것이다. 까마귀는 그것을 입에 물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마치 묻는 것처럼.


진철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머물러도 되는 곳이 아니며, 돌아갈 수도 없는 곳이라는 걸.


“이제 가야 해?”


그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까마귀는 대답 대신 울음 같은 숨소리를 냈다. 울지도, 침묵하지도 않는 중간의 소리였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깃털이 공기를 가르며 흩날렸다. 그 순간, 진철은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무언가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무게 같은 것.


까마귀는 플랫폼 끝에서 한 번 더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밤 속으로 사라졌다.


진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역을 벗어나며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인생은 계속해서 종착역을 가장한 문을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어떤 문 앞에는, 말없이 길을 알려주는 검은 새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날 이후로 진철은 까마귀를 보면 발걸음을 멈췄다.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날아가는 방향을 보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또 하나의 비긴 어게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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