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스마트티비는 꺼져 있지 않았다. 화면은 언제나처럼 밝았고, 앵커의 입술은 정확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소리는 방 안을 가득 채우지 못하고, 중간중간 빈 곳을 남겨두었다. 나는 그 빈 곳이 좋았다. 소리가 머무르지 못한 자리마다 내 호흡이 들어앉았다. 숨은 소리보다 더 오래 남았다.
뉴스는 늘 같은 리듬으로 시작한다. 누군가의 불행, 누군가의 숫자, 누군가의 “가능성”. 하지만 그 문장들은 내게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낡아 있었다. 마치 다른 도시에서 보낸 엽서처럼. 주소가 맞는데도, 내가 기다린 사람의 글씨가 아닌. 나는 그래서 뉴스의 내용을 듣기보다, 뉴스가 “흘러나온다”는 사실만을 듣는다. 흐르는 것들에겐 표정이 없다. 표정이 없는 것들은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방은 조용했다. 완전히 고요한 건 아니었다. 냉장고가 아주 가끔 낮게 울었고,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면 커튼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때마다 방은 작은, 아주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나는 그 파문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숨을 들이켰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나라는 사람이 한 번 더 생성되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라는 좌표에, 나를 다시 놓아두는 일.
이런 순간엔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상실이란 단어가 아직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을 때, 이미 나는 몇 번의 상실을 연습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지우개, 사라진 친구, 약속을 어긴 오후,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상실은 언제나 작은 형태로 먼저 온다. 작은 형태의 상실을 많이 겪은 사람은 큰 형태의 상실 앞에서 덜 울게 되는 걸까. 아니면, 더 조용히 더 오래 울게 되는 걸까.
나는 한동안 누군가와 함께 살았다. “함께”라는 말은 언제나 따뜻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내 경험 속의 함께는 종종 차가웠다. 둘이서 만드는 침묵은 혼자 있는 침묵보다 무거웠다. 침묵이 서로의 것을 빼앗아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지금의 침묵은 다르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빼앗지 않는다. 그냥 여기에 있다.
스마트티비의 앵커는 날씨를 말한다. 내일은 약간 춥고, 모레는 약간 더 춥다. 나는 그 예보를 믿지 않는다. 예보는 언제나 “약간”이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추위는 약간이 아니라, 어떤 기억의 질감이다. 오래전 겨울,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내가 입고 있던 얇은 코트. 그때 내 어깨에 내려앉던 공기의 무게. 그 무게는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추위를 볼 때마다, 날씨가 아니라 내 안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 장면이 떠오르면, 방 안의 모든 것이 조금씩 뒤로 물러난다. 소파가 소파가 아니라 소파의 그림자가 되고, 테이블이 테이블이 아니라 테이블의 기억이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현재에 있는지 과거에 있는지 구분이 흐릿해진다. 이때 나는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무엇을 잃고 있지?”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것도. 그리고 그게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얼마나 드문지, 나는 너무 잘 안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 순간은 선물처럼 온다. 그래서 나는 이 고요를 좋아한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서 채워지는 행복감. 그 행복은 화려하지 않다. 밝게 웃지 않는다. 그저 내 안에서 조용히 불을 켜는 것처럼, 작은 열을 만든다.
가끔 나는 이 방이 거대한 수조 같다고 느낀다. 나는 그 안의 물고기다. 바깥 세상은 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고, 소리는 물을 통과하며 둔해진다. 그래서 뉴스도, 사람들의 말도, 내가 한때 뜨겁게 믿었던 다짐들도, 전부 조금씩 느려진다. 느려진 것들은 나를 상처 내지 못한다. 상처는 대개 너무 빠르게 온다. 몸이 반응하기 전에 마음을 찌른다. 하지만 느려진 것들은, 찌르는 대신 스친다.
나는 스치는 감각을 사랑하게 됐다.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 커튼의 움직임.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숨의 리듬. 어떤 약속이 아니라, 약속이 없는 밤. 이 방에서 나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도 가끔, 아주 가끔, 나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한다. 이 고요가 정말 내 것인지, 아니면 내가 고요 속으로 도망쳐 들어온 것인지. 고요는 때때로 은신처처럼 부드럽고, 때때로 감옥처럼 단단하다. 그 차이는 아주 작은 지점에 있다. 내가 고요를 선택했는지, 고요가 나를 선택했는지.
그 구분이 흐려질 때, 스마트티비의 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진다. 앵커가 말하는 단어 하나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린다. “실종.” “사망.” “사과.” “회복.” 단어들은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내 발치에 떨어진다. 나는 그 단어들을 주워 담지 않는다. 그냥 바라본다. 단어도 물건처럼 오래 바라보면 낡는다. 낡으면, 덜 아프다.
나는 물을 한 잔 마신다. 물이 목을 지나갈 때,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숨보다 더 확실한 감각. 살아 있다는 건 늘 이런 식으로 확인된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삼키는 일. 눈을 깜박이는 일. 오늘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는 일.
나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가, 채널을 바꾸지 않는다. 소리를 끄지 않는다. 뉴스는 계속 흐르게 둔다. 흐르는 소리는 방의 가장자리에서 얇게 흔들리고, 내 숨은 그 가운데에서 천천히 자란다. 이 적막함, 적막 속을 채우는 내 숨소리. 누군가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밤. 하지만 내게는 분명히 있다. 내 안에 무언가가 채워진다. 비어 있던 자리에 작은 온기가 들어온다.
나는 생각한다. 상실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고. 다만 상실이 내 삶의 표면에서 물속으로 내려가는 날이 있을 뿐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실은 계속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뉴스의 소리, 숨의 리듬, 커튼의 움직임 같은 것들. 그 작은 것들이야말로, 상실이 다 못 가져가는 것들이니까.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나는 웃는다. 웃음은 소리 없이 생기고, 소리 없이 사라진다. 마치 나만 아는 비밀처럼.
그때 스마트티비 화면이 잠시 흔들린다. 신호가 약해진 듯 픽셀이 깨지고, 앵커의 얼굴이 낯선 모양으로 찌그러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오래전에 떠나간 사람. 떠나가며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던 사람. 그 얼굴은 분명히 내 기억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데, 화면의 흔들림 속에서 잠깐 현실의 형태를 빌려 나타난다.
나는 숨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