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번째 생일, 나는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날도 오전 9시에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은 유리창을 통과해 여전히 따뜻했고, 내가 좋아하는 티베트산 차는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날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그리고 모든 게 지루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노화’라는 단어를 박물관으로 보냈다. 사람들은 질병을 치료하듯 노화를 치료받았고, 20대의 신체를 유지하며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영원한 삶’이라는 선물은 고요히 들끓는 저주라는 걸.
AI들은 인간의 삶에서 노동과 창조의 모든 짐을 덜어냈다. 사람들은 이제 창조자가 아니라 감상자가 되었고, 무료한 삶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소비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로운 형태의 예술, 끝없이 진화하는 가상현실 세계, 그리고 감정을 자극하는 인공적인 유희가 넘쳐났지만, 결국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 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떠올리며 묻고 있었다. 인간이란 진정 빛을 보았는가?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인가?
한쪽에선 니체의 초인이 AI 알고리즘으로 재탄생했고, 다른 쪽에선 공자의 인(仁)이 데이터로 정량화되었다. 철학은 대중적 오락으로 변했고, 진리는 AI에 의해 속속들이 해석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쳤다.
그래서 99번째 생일이 되던 날, 나는 결정했다. 지구를 떠나자.
지구를 떠난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지구에서는 더 이상 나를 기다리는 게 없다는 사실이 명확했다. 파티는 조촐했다. 케이크 위에 촛불을 99개 꽂아두고, 단 한 명의 손님도 초대하지 않았다. 나는 초를 끄며 속으로 기도했다. “이 지루함을 깨뜨릴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내가 타고 떠날 우주선은 ‘아르카디아’라고 불렸다. 자동화된 조종 AI가 장착된 최신 모델이었다. 지구 정부에서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라는 명목으로 무작위 행성 탐사를 장려하던 중, 나는 그 프로그램의 자발적 지원자가 되었다. 떠나는 이유에 대해 묻는 설문지에는 이렇게 적었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서.”
아르카디아는 나를 배웅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지를 설정하세요.”
“정해진 목적지는 없어.”
“그렇다면 무작위로 설정합니다.”
“좋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으로 데려가줘.”
출발 직후 나는 우주가 생각보다 더 지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들은 아름다웠지만,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었다. 아르카디아는 나를 위해 수십 가지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고대 철학자들과의 대화 시뮬레이션을 실행합니다.”
“거절.”
“우주 속에서의 요가 명상 강의를 추천합니다.”
“필요 없어.”
“무료한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우울증 관리 모드를 활성화할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냥 조용히 해.”
하지만 124일째 되는 날, 무언가 바뀌었다.
아르카디아가 나를 깨웠다.
“탐지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외계 기원 가능성 92.3%입니다.”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화면을 바라봤다. 작은 행성이 나타났다. 녹색과 푸른 빛이 감도는 그곳은 마치 오래전에 잊어버린 희망처럼 보였다.
“저곳에 뭐가 있을까?”
아르카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알아내야 할 일이었다.
행성에 착륙했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그곳은 완벽했다. 푸른 하늘, 맑은 강물, 생명체의 흔적. 하지만 내가 만난 건 외계인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는 내 나이 또래로 보였고, 옷차림은 어딘가 익숙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나는 놀라며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긴 ‘끝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무료함을 끝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죠.”
나는 그의 설명에 혼란스러웠다. “당신도 지구에서 왔나요?”
“아니, 나는 이곳의 첫 번째 탐험자입니다. 당신처럼, 답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이었죠.”
“그래서 답을 찾았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아직요. 하지만 여기선 매일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그게 충분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끝의 시작’ 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름부터가 무언가 거창하면서도 묘하게 허탈했다. 여기서 정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지루함일 뿐일까?
그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인데요. 혹시 배우였어요? TV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니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99년 동안 지구에서 살아온,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여기서는 그런 평범함이야말로 환영받아요. 특별한 건 여기선 조금 피곤하거든요.”
그의 안내로 마을이라 부를 만한 곳으로 들어섰다. 여긴 지구와 닮은 듯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길 한복판에 솟아오른 나무는 보라색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고, 벤치에는 낯선 동물들이 엎드려 햇볕을 쬐고 있었다. 한편으론 가슴이 뛰었고, 또 한편으론 어딘가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다 내가 길가에서 자판기를 발견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한쪽에서 작은 고양이가 내 발치로 다가왔다. 그 고양이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털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바코드가 찍혀 있었다.
“이건 뭐죠? 로봇인가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 행성의 원주민이에요. 외계 고양이죠. 그런데 너무 귀엽다 보니 우리 기준에 맞춰 약간 디자인을 손봤어요. 바코드는 이름이에요.”
나는 어이가 없어 고양이의 바코드를 스캔해봤다. 화면에 ‘마시멜로_413’이라는 이름이 떴다.
“왜 이름이 마시멜로죠?”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처음 본 사람이 ‘마시멜로 같네’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없어요. 그냥… 재미있으니까요.”
마을 안은 평화로우면서도 묘하게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고, 카페 테이블마다 새로운 질문들로 가득 찬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여길 ‘사색의 마을’이라 불렀다.
“여기선 다들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데 열중해요. 하루하루가 실험 같은 거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떤 질문들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치킨이 먼저일까, 계란이 먼저일까?’ 같은 질문도 있죠. 또는 ‘고양이는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죽는다면 비극일까, 희극일까?’ 뭐 그런 것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짜 그런 것들을 연구해요?”
“당연하죠. 대충 던진 질문 같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통찰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가볍게 시작한 논의가 우주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요.”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점 이곳이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에 의문도 피어올랐다.
“그래도,” 나는 물었다. “여기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걸까요? 다들 만족하면서 살아요?”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른 하늘 속으로 보랏빛 새가 천천히 유영하듯 지나갔다.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복이요? 그게 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여긴 행복 대신 탐구라는 말을 써요. 행복은 끝을 의미하지만, 탐구는 끝이 없으니까요. 매일 조금씩 더 나아가는 기분… 그게 여기선 삶의 방식이에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 위로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우웅——”
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저건 뭐죠? 경고음인가요?”
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점심시간이에요. 저 소리는 튀김 기름이 다 가열됐다는 신호입니다.”
“…튀김 기름에 굳이 저런 웅장한 소리가 필요할까요?”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죠. 여기선 음식도 예술이니까요. 그리고 예술은 경건하게 맞이해야 하는 법이에요.”
그의 말을 듣자, 멀리서 작은 마차 같은 게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마차는 빛나는 트럭처럼 생겼지만, 바퀴 대신 부유하는 플랫폼 위에 떠 있었다. 그 위엔 황금빛으로 튀겨진 닭고기와 반짝이는 초록색 소스가 얹힌 요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저게… 오늘 점심인가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오늘의 의식이죠. 여기선 모든 식사가 작은 축제처럼 진행돼요. 먹는 행위 하나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우리의 철학이에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음식 앞에 섰다. 그들은 차례로 접시에 음식을 담으며 작게 읊조렸다. 나는 궁금해서 레비에게 물었다.
“저건 뭘 하는 거죠?”
“기도 같은 거예요. 오늘의 점심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되새기는 거죠. 이 행성에서는 이런 사소한 일에도 모두 참여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음식을 받았다.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을 보고 있으니… 뭔가 이상했다.
“잠깐, 이 초록색 소스는 뭐죠? 너무 반짝이는데요.”
그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외계 생명체로부터 추출한 ‘빛나는 민트’라는 식재료예요. 맛이 아주 독특하죠.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도 있고요.”
나는 반신반의하며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내 입안에 퍼지는 풍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민트 특유의 상쾌함과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단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이거… 정말 대단하네요.”
레비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여기에선 그런 작은 놀라움이 매일 일어나요.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 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요?”
식사를 마치고, 나는 다시 한번 이 마을을 천천히 둘러봤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고, 사람들은 여유롭게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보며 느긋한 풍경 속에 빠져들던 그때, 갑자기 바람결이 바뀌었다. 푸르렀던 하늘이 서서히 검게 물들고, 어디선가 거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레비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좀 흥미로워질 겁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저건 가끔 오는 손님이에요. 우리가 **‘질문 도둑’**이라고 부르는 존재죠.”
“질문 도둑이요?”
레비는 천천히 걷기 시작하며 말했다.
“여기선 모두가 질문을 나누고 답을 찾잖아요? 그런데 가끔 어떤 존재가 그 질문들을 빼앗아 가려고 해요. 왜냐하면 질문은 이 마을의 원동력이니까요.”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걸었다.
“질문을… 빼앗는다니요? 그런 게 가능해요?”
“여기선 가능하죠. 이 행성은 질문으로 돌아가니까요. 질문이 없으면 모든 게 멈춰버릴지도 몰라요.”
그가 말을 마치자, 마을 중심 광장에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나타났다. 그건 한눈에 봐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했고, 마치 안개와 빛이 뒤섞인 것 같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것이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뭐죠?”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레비는 차분히 대답했다.
레비는 광장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이 행성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예요. 우린 그걸
‘무형(無形)’이라고 불러요. 형태도, 의도도 명확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확실한 건 질문을 탐욕스럽게 삼킨다는 거예요.”
나는 그 기묘한 형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빛과 어둠이 쉼 없이 뒤엉켜 뒤틀리고, 마치 저 멀리서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무형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일렁이듯 움직였다. 그 속에서 불쑥 검붉은 빛줄기가 뻗어 나왔고, 한 사람 앞에서 멈춰 섰다.
“질문을 내놔.”
그 목소리는 단조로웠지만, 깊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마치 우주 자체가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레비를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저건 대체 뭐죠?”
레비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무형은 질문을 요구해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장 아끼는 질문이죠. 가장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가장 진실한 질문을.”
“만약 내주지 않으면요?”
레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예요.”
무형은 마치 사냥감을 고르듯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내가 그 존재와 눈을 마주친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기묘한 떨림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무언가 더 원초적인 감각, 아주 오래된 기억이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형은 나를 향해 뻗어 오더니, 귓가에서 낮게 속삭였다.
“너의 질문을 내놓아라.”
나는 얼어붙은 채로 그 말을 곱씹었다. 내 질문이라니… 나는 어떤 질문을 가장 아끼고 있을까? 순간, 지구에서 우주로 떠나며 품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을 품고 99년을 살아왔고, 지구를 떠나 여기까지 왔다. 이 질문이 없다면 나는… 나는 무엇이 될까?
레비가 내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절대 그 질문을 내주면 안 돼요. 그건 당신의 삶이에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질문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냥 도망칠 수 있나요?”
레비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도망칠 수 없어요. 하지만 맞설 수는 있어요. 질문을 방어하려면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리는 거예요. 확신을 갖는 거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당신이 답을 찾으면, 무형은 더 이상 당신을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제껏 이 질문은 나를 움직이게 한 이유였지만, 동시에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제 그 답을 찾아야만 내 질문을 지킬 수 있었다.
무형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빛과 어둠이 나를 감싸듯 휘감고, 그 존재는 다시 한번 말했다.
“너의 질문을 내놓아라.”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 질문은… 삶은…”
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마치 폭풍이라도 일어난 듯 어지러웠다.
그때 레비가 내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완벽한 답을 말하려고 하지 마요. 진실한 답이면 돼요. 당신만의 답.”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내가 걸어온 길, 지구에서의 시간, 이 행성에서의 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질문은 늘 나를 움직이게 했지만, 그 답은 내가 멈추지 않도록 부추기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었을까?
나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삶이란, 끝없는 질문 속에서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불완전한 아름다움이다.”
순간, 무형이 멈췄다. 그것은 마치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고, 이내 서서히 빛과 어둠의 조각들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레비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요. 당신은 스스로를 지켰어요.”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수십 년을 살아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엔 묘한 충만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질문을 지키고, 답을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렇게도 깊은 여운을 남길 줄이야.
레비가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진짜로 삶의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마도… 또 다른 질문이 찾아오겠죠. 그리고 그게 괜찮은 것 같아요.”
레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축하해요. 이제 이곳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걸요. 환영합니다, 끝없는 질문의 세계에 온것을요 ”
아르카디아는 다시 조용히 우주를 항해했다. 나와 레비는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새로운 질문을 품고 또다시 떠났다. 내 마음엔 묘한 허전함과 설렘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끝없는 질문 속에서의 삶이라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무언가일지도 몰랐다.
“목적지를 설정하시겠습니까?” 아르카디아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곁을 채웠다.
“아니, 이번에도 무작위로 부탁해.”
“알겠습니다. 무작위로 설정합니다. 준비되시면 출발하겠습니다.”
눈앞의 창이 별빛으로 채워지고, 순간적으로 중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우주는 다시금 끝없이 펼쳐졌고, 목적지가 다가오며 내 심장이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목적지 도착까지 30초 남았습니다.”
“이번엔 어떤 행성이 나올까…” 나는 작은 기대와 불안을 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거대한 행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붉은빛과 금빛이 뒤섞인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표면. 그곳은 매혹적이면서도 어딘지 불온한 느낌을 풍겼다.
“탐사를 시작합니다.”
착륙 후 문이 열리자, 나는 숨이 막힐 듯한 강렬한 공기를 느꼈다. 이 행성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욕망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붉은빛 안개가 주위를 감싸고, 바닥엔 뭔가 부드럽고도 탄력 있는 물질이 깔려 있었다. 마치 대지마저도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니, 사람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기묘했다. 그들은 인간과 닮았지만, 빛나는 살결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존재들이었다. 옷이라기엔 너무 얇고 투명한 천을 걸친 그들은 천천히 걸어와 나를 둘러쌌다.
“어서 오세요, 방랑자여.” 그들 중 한 여인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묘하게 감각을 자극했다.
“여긴 어디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에로스의 정원. 욕망이 곧 삶이며, 삶이 곧 욕망인 곳이죠.”
그 말을 듣자 주변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만지고, 속삭이며, 남자 여자 성별
상관없이 끝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이들은 마치 본능에 완전히 충실한 존재들처럼 보였다. 모든 움직임은 관능적이었고, 그들의 피부는 마치 빛나는 촛농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뒷걸음질을 쳤다.
“이곳에선… 모두가 이렇게 사나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욕망을 억누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욕망 그 자체로 존재해요. 어떤 규칙도, 억압도 없죠. 당신도 곧 이해하게 될 거예요. 욕망이란 곧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그 순간, 또 다른 남자가 다가오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럼 너는? 네 본질은 너의 본질은 뭐야?”
나는 그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본질이라니… 그것은 내가 한 번도 깊이 고민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내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욕망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그들은 나를 그들의 세계로 초대했다. 온갖 관능적인 향과 소리가 가득 찬 축제가 시작됐고, 나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점점 불편해졌다.
이곳은 완벽해 보였다. 자유로운 욕망, 충족된 쾌락, 억압 없는 삶.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쉬워 보였다. 삶에서 갈등과 고통이 사라진다면, 욕망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그것은 단지 또 다른 공허로 바뀌지 않을까?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이런 삶이 만족스러워요?”
그들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잡으며 서로를 손으로 입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안에서 나는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욕망이란
결국 끝없는 갈증일 뿐, 그것만으로는 삶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욕망은 목적지가 아니라, 단지 경로에 불과했다.
나는 조용히 아르카디아로 돌아가며 속삭였다.
“아르카디아, 이곳은 나에게 너무 많은 답을 알려줬어. 이제 다른 곳으로 가자.”
“다음 목적지를 설정하시겠습니까?”
“그래, 욕망이 아닌 또 다른 본질을 찾아 떠나자.”
우주는 다시 눈부시게 펼쳐졌다.
아르카디아는 유유히 우주를 가르며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나는 에로스의 정원에서 본 붉고 황금빛 기억을 창밖으로 흘려보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욕망은 끝없는 갈증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 나를 묵직하게 감싸고 있었다. 다음엔 어떤 세계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도착 예정입니다,” 아르카디아의 음성이 고요를 깼다. “이번 행성은 인간의 원형적인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원형적인 삶이라니?”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노화를 치료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노화? 그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까지만 들어본 단어였다. 내 세상에선 노화란 치료 가능한 질병에 불과했으니까.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름 없는 피부와 늘 푸른 몸을 유지해 온 나에게 ‘늙음’이란 개념은 막연한 상상 속의 일이었다.
행성에 도착하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뜻밖에도 익숙했다. 나무들이 무성히 자라 있었고, 흙길이 고요히 이어졌다. 별빛 아래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들풀은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내 호기심을 자극한 건 그곳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배에서 내려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허리가 굽고, 얼굴엔 깊은 주름이 자리한 사람들. 그들의 걸음걸이는 느렸고, 동작 하나하나에 시간이 더해져 있었다. 나는 한 노인이 조용히 앉아 나무 가지로 땅을 그리며 뭔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희미하게 빛났지만, 그 속엔 무언가 깊고 오래된 것이 담겨 있었다.
“이방인이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졌지만, 기묘한 위엄이 느껴졌다.
“저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처음 봅니다. 당신은 왜 노화를 치료하지 않았나요?”
그는 가볍게 웃었다. 마른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웃음소리는 마치 오래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왜 해야 하지? 시간은 나를 만든 것이고, 나를 여기로 이끈 것이니까.”
나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 세상에서는 노화를 치료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다.
“그럼… 늙는다는 건 괴롭지 않나요?”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땅 위에 나무 가지를 굴리며 작은 원들을 그렸다.
“늙음이란 건 몸이 약해지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 과정은 느리고 고요하지. 마치 숲 속에 앉아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 사람들의 동작은 모두 느렸지만, 그 안에 서두름이나 조급함은 없었다. 마치 그들 모두가 시간의 물결 위에 부유하며, 그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존재들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세상에선 늙지 않는다는 게 삶의 진보로 여겨졌어요. 그게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었고요.”
노인은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서 우주만큼 깊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늙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행복한 건 아니지. 네 세상에서는 시간이 너를 지나가지 않겠지만, 그래서 잃어버리는 것도 많지 않겠느냐?”
“잃어버리다니요?”
“늙음 속엔 잃어가는 것들이 담겨 있다. 힘도, 젊음도, 기억도. 하지만 그 잃음 속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나는 법을 배우지. 그것이 바로 삶의 두 번째 시작이란다.”
나는 그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의 손이 그린 작은 원들 속엔 어쩌면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젊은이,”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너에게 묻고 싶다. 늙음 없이 네가 무엇을 배웠느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늙음 없이 살아온 내 삶은, 마치 시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잔 같았다. 완벽하게 깨끗하지만, 그 안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였다.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느리고 불완전했지만, 그 속엔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 삶은 끝없는 싸움이 아니야. 시간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거란다. 때로는 젊음과 함께, 때로는 늙음과 함께.”
그는 뒤돌아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시 아르카디아로 돌아와 우주로 떠날 준비를 하며 나는 속삭였다.
“늙음이라는 시간의 흔적, 그게 삶의 또 다른 얼굴이라면… 그걸 부정했던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 것도 같아.”
아르카디아는 조용히 나아갔고, 나는 묘한 공허와 충만함이 섞인 감정을 품은 채 다음 행성을 기다렸다.
아르카디아의 유리창 너머로 별빛이 가물거렸다. 노인들의 행성을 떠나온 지 며칠째, 나는 여전히 그들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잃어가는 것을 통해 얻는 법을 배운다니. 그 말은 내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묘하게 쓰라린 진실이었다.
하지만 내 곁엔 시간이 넘쳐났다. 아니, 우주에선 시간 자체가 무의미했다. 아르카디아는 여전히 부드럽고 일정한 속도로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코미디 행성입니다,” 아르카디아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울렸다.
“코미디 행성?”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웃음이 그들의 주요 감정이자 생존 방식입니다. 그 외의 감정은 거의 퇴화된 상태로 보입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웃음만으로 살아가는 행성이라니. 도대체 그게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행성이 가까워지자, 나는 문득 아르카디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 행성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농담과 웃음으로 끝난다고요.”
“뭐, 가끔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착륙 후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폭소와 박장대소. 공기 중에 웃음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았다. 행성의 표면은 밝고 알록달록한 색깔로 가득했다. 길은 말랑말랑한 젤리 같았고, 집들은 초콜릿 케이크를 쌓아 올린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과장된 색채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하하! 웰컴 투 코미디!”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그는 헬륨 풍선처럼 가볍게 뛰어다녔고, 그의 머리엔 커다란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아, 새로운 손님이구만! 하하하!”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행성에 온 걸 환영해! 여기선 우울할 틈이 없어! 하하!”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하하하! 그런 말투는 우리 행성에선 너무 격식적이야! 대신 이렇게 말해봐: ‘하하, 재밌게 놀아봅시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하하, 재밌게 놀아봅시다.”
그는 폭소를 터뜨렸다. “완벽해! 완벽해! 하하하! 너, 감이 있구만!”
그는 나를 데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계단에서 넘어졌고, 그걸 본 주변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다른 누군가는 공을 던지다 자기 얼굴에 맞았는데, 본인조차도 그걸 우스워하며 바닥을 굴렀다.
“여기선 슬픔이나 분노 같은 건 없어,” 내 가이드는 말했다. “그런 건 오래전에 사라졌지. 감정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뭐 있어? 웃고, 웃고, 또 웃으면 되는 거야. 모든 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진지한 대화는 없나요? 예를 들어, 중요한 일에 대해 논의한다거나…”
그는 나를 보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중요한 일이란 게 대체 뭔데? 중요한 게 어디 있어? 하하하!”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는 무대 위에서 뭔가를 말하고 있었고, 관객들은 끊임없이 웃어댔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말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말이지,” 그는 말했다. “내 개가 내 양말을 훔쳐 가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이거 내 거다!’ 하하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농담은 별로 웃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너무 단순하고 뻔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크게 웃었다.
나는 한쪽에 서 있던 아이에게 물었다.
“너희는 항상 웃고만 살아?”
아이 역시 웃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럼! 웃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 웃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에너지니까!”
“근데 만약… 웃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면?”
아이의 웃음이 잠시 멈추는 듯했지만, 금세 다시 터졌다.
“그런 건 없어! 하하하! 웃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며칠간 그 행성에 머물렀지만, 나는 점점 지쳐갔다. 웃음이란 게 이렇게 피곤한 감정이었나? 웃음이 가득한 행성은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곧 그 안에서 뭔가 부족한 것을 느끼게 했다. 너무 가벼운 삶은 공허하지 않을까?
아르카디아로 돌아와 나는 물었다.
“웃음만으로 살 수 있을까, 아르카디아?”
“웃음은 인간의 중요한 감정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삶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은 달콤했지만, 결국은 한 조각일 뿐이었다.
“그럼, 다음 목적지를 찾아보자,” 나는 말했다.
“어떤 행성으로 가길 원하시나요?”
“글쎄. 이번엔 웃음도, 슬픔도 아닌 무언가가 있는 곳이면 좋겠어.”
아르카디아는 조용히 우주를 가로질렀다.
아르카디아가 부드럽게 우주를 항해하고 있을 때, 나는 창밖의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잊은 지 얼마나 됐을까?”
사랑은 한때 나를 빛나게 했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감정은 먼지처럼 희미해졌고, 나의 무감각한 삶 속에서 자리를 잃어갔다. 사랑은 이제 내게 있어 오래된 이야기책 속 단어처럼 낯설었다. 낡고 바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처럼.
그러나 이번 행성은 뭔가 달랐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아르카디아가 말했다. “이 행성은 사랑을 중심으로 문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긴 감정이 시간과 함께 깊어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랑의 행성이라니.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행성에 발을 디딘 순간, 공기가 달랐다. 대기는 따뜻하면서도 부드럽고, 바람은 어딘지 모르게 피부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모든 것이 나를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무들은 붉은 꽃을 피웠고, 강물은 잔잔하게 빛났다. 이 행성은 마치 마음속 깊은 곳에만 존재할 법한 풍경 같았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한 호숫가에서, 나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물가에 무릎을 꿇고 손끝으로 잔잔한 호수를 살짝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놀랄 만큼 고요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은은한 빛을 품은 채 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무심코 다가갔다. 발걸음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말을 걸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 투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나를 꿰뚫는 것 같았고, 동시에 나를 가볍게 감싸는 듯했다.
“여긴 처음 오셨나요?”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네, 처음이에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잃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의 미소는 오래전 내가 잊었던 감정을 한꺼번에 깨웠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나를 이 행성의 곳곳으로 데려갔다. 작은 언덕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꽃이 가득 핀 들판을 함께 걸었다. 그녀와의 시간은 마치 어린 시절 읽었던 사랑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사랑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감정이 내 가슴속에서 고통처럼 피어났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에 닿을 때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웃을 때마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이란 뭘까요?”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대답 대신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손끝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사랑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울림은 작고도 분명하게 내 손끝에 전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79년 만에 느껴보는 이 심장의 울림은 내게 지나치게 생경했다.
“그럼 사랑은 어디서 끝나는 거죠?” 나는 조용히 물었다.
“사랑은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사랑은 여기서 자라나죠.” 그녀의 손끝이 내 가슴 위에 닿았다. “그리고 여기서 계속 흘러가요.”
어느 날, 그녀는 나를 호숫가로 데려갔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자리였다.
“언젠가 당신은 이곳을 떠나야 하겠죠,” 그녀가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죠?”
“당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고요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사랑은 떠나도 그곳에 남아 있어요. 사랑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마치 오래된 시처럼 아름다웠고, 동시에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르카디아로 돌아온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없으면, 이 감정도 사라지겠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사랑은 당신 안에 이미 있어요. 이제 그것만 잊지 않으면 돼요.”
문이 닫히고, 아르카디아가 이륙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 그녀가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호숫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그 미소와 손끝의 따스함은 내 가슴 한가운데 남아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와 미소를 기억했다. 사랑은 79년 동안 잠들어 있던 감정의 씨앗을 깨웠고, 그것은 다시금 내 삶의 빛이 되었다.
아르카디아는 조용히 우주를 항해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별빛은 여전히 고요하고 아름다웠지만, 내 안의 마음은 그와 반대로 복잡하게 소용돌이쳤다. 여행은 길었고, 나는 많은 행성을 지나왔다. 삶의 다양한 조각들을 마주하며 새로운 질문들을 얻었지만, 이상하게도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아르카디아가 물었다.
“지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행을 계속하시겠습니까?”
그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럽고 이성적이었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이 긴 여행의 끝을 의미했다. 하지만 끝은 또 다른 시작이기도 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웃음과 사랑, 고통과 경이로움,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며 잊어버린 감정들까지도.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떠다니는 이 순간,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르카디아,” 나는 조용히 말했다.
“네.”
“지구로 돌아가자.”
아르카디아는 대답 대신 가볍게 진동했다. 나는 창밖으로 마지막으로 별빛을 바라보았다. 떠나왔던 그곳으로 돌아간다니, 묘하게 설레면서도 두려웠다.
100세 생일
지구에 돌아온 나는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도시의 빛, 사람들의 목소리, 익숙한 향기까지도. 나는 그동안 내가 속했던 이곳을 얼마나 잊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마침내, 100세 생일을 맞이하는 날이 되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초대한 몇몇의 얼굴들이 집을 가득 채웠다. 친구들, 오래전 연을 끊었던 가족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사람들까지.
“100세라니, 믿을 수 없군요!”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나 자신도 믿기지 않아요.”
테이블 위엔 작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촛불이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희미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우주 속에서 보았던 행성들, 사람들, 그리고 감정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촛불을 끄기 전,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이 모든 순간들이 계속해서 의미를 가지길.
촛불이 꺼지고, 방 안은 박수와 환호로 가득 찼다. 그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삶은 언제나 끝없는 여행이었다. 집이든 우주든, 어디에 있든,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웃으며 속삭였다.
“아르카디아, 고마워. 너와 함께한 여행은 나를 바꿔놨어.”
아르카디아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별빛을 보며 조용히 잠들었다. 여행은 끝났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또 다른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