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0월의 행각
1.
내가 어릴 때 살던 동네에는 낡은 빌라들이 많았다. 개발 공사가 되기 전이라 과거의 전유물 같은 것들이 이곳저곳에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빌라 뒤편에 있던 호박마차다. 말 그대로 진짜 호박마차 모양처럼 생긴 그네였는데 쇠창살로 된 돔 안에 들어가면 둘이서 마주 보고 앉아 앞뒤로 움직일 수 있는 그네였다. 그 마차는 어린 내가 발견했을 때에도 이미 꽤나 낡아있었다. 친구와 둘이서 마차를 탈 때면 녹슨 쇠의 이음새에서 나는 소름 끼치는 끼익 끼익 소리가 그 주변으로 퍼지곤 했으니까.
2.
주말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나서 집 가는 길에 호박마차가 떠올랐다. 내가 직접 겪었던 기억이니 어딘가 남아있었겠거니 싶지만 정말 불현듯이 떠올라서, 내가 이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었어? 그래 어릴 때 그런 게 있었지- 하며 혼자 좀 반가워했었다. 그렇게 옛 기억을 추억하다 보니 문득 '아, 영원한 것은 정말 없구나' 싶었다. 늘 내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평생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도,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던 호박 마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저마다 다른 끝을 맞이했듯이.
3.
세상은 무너지고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는구나. 어쩌면 그런 게 인생이구나.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에 둥실 떠오르고 나서는 또 하나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무너질 것을 아는 인생임에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건 어떤 마음일까. 이번 세상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어보면서, 쉽게 무너지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사랑을 하고 정을 쌓고 땅을 일구는 건 어떤 마음일까.
4.
이렇게 긴 글을 쓰면 누가 볼까? 내 생각 꾸러미들로 가득 찬 글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냥 그런 생각들이 들어서 블로그에도 어느 곳에도 긴 글을 제대로 쓴 적이 없다. 근데 제대로 써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 살다 보면 자꾸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유난히 좋은 하루를 보내고 왔을 때, 어느 날보다 울적한 하루를 보내고 왔을 때. 부쩍 날씨가 추워졌다고 느낄 때. 번뜩 어떤 것이든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5.
23년 10월, 한 해를 10개월 지내보고 나니 부쩍 지친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걸 던져버리고 어디론가 겨울이 가득 찬 곳으로 떠나고 싶다. 눈 내리는 소리나 들으면서, 춥다는 말이나 반복하면서, 이름도 모르고 들어간 가게의 온기를 충분히 만끽하면서 유유자적한 시간이나 보내고 싶어진다. 그럼 또 이 루틴한 일상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귀소본능이 강해서 오랜 일정의 여행 같은 건 절대 못 가는 성격이니 말이다.
6.
10월은 따뜻하게 배를 채우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된 달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카레가 갑자기 먹고 싶어서, 먹을 만큼의 재료를 사다가 순서대로 손질하고 야채가 국물을 머금을 때까지 푹 졸이는 짓을 저번 주도, 이번 주도 해댔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씻어 내야 할 그릇도 많이 생기지만,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스며오는 찬 바람을 부채질 삼아 뜨거운 카레 속 더 뜨거운 감자를 숟가락으로 도각도각 조각내서 국물과 함께 입안 가득 넣으면, 밥 먹는 동안만큼은 카레 맛만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이것도 아직 추위를 견딜만한 10월에만 할 수 있는 짓일 것 같다. 남은 카레 국물에는 꼭 우동을 끓여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