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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자넨 누구지?

눈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면, 주변이 흐려진다.

by 두부언니


상영시간이 (반지의 제왕도 아니고)무려, 3시간이라는 사실을 시사회장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중간에 못 보겠다 싶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 했는데, 180여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영화 『작가 미상』은 2차 세계대전 언저리의 독일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쿠르트는 유소년 시절을 나치의 지배 아래서 보내고, 청소년기는 소련의 지배 아래서 보낸다. 이후에 서른 즈음의 청년이 되어서는 사회주의 체계를 고수하는 동독을 떠나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서독으로 향한다.


쿠르트의 유년을 따라 청년기에 이르다 보면, 산업혁명-사회주의-자유주의에 이르는 현대미술사를 전반적으로 훑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시대가 넘어감에 따라 쿠르트가 특징적으로 하는 행동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신이 그린 그림 위에 흰색 페인트를 덮는 것이다. 쿠르트의 그림은 때로는 자의로 인해 때로는 타의에 의해 하얀 물감으로 덮인다.


@unsplash




근데, 자넨 누구지?


그는 간판공장에서 처음으로 예술학교의 입학 제의를 받았을 때, 빨간색으로 칠해진 간판 위에 실수로 흰 페인트를 엎을 뻔한다. 이후 동독의 미술학교에서 연인인 엘리를 만난 뒤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그린 습작 위에 스스로 흰 페인트칠을 한다.


시간이 흘러 쿠르트는 동독에서 벽화를 그리게 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게 되는데, 그 명성이 정점을 찍을 때 즈음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서독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그가 서독으로 떠난 뒤 그의 그림은 동독의 예술학교 관계자들이 흰 페인트칠을 해 덮어 버린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흰색 캔버스가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동독의 예술학교에서 쿠르트가 페르텐 교수에게 '근데, 자넨 누구지?'하는 질문을 듣고 난 직후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건 지방과 펠트(추락한 전투기에서 목숨을 구해준 인디언이 간호할 때 사용했던)를 의미해. 그건 내가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거니까....
여기 있는 이것들은 자네가 아니야. 데카르트는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했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지. 그리고 그 존재를 '자신'이라고 명명했네. 근데, 자넨 누구지?


페르텐 교수는 지방과 펠트가 그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 이모는 피아노의 A음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말했고, 엘리는 끊임없이 옷을 지었으며, 권터는 바닥이며 벽에 못을 박는 것도 모자라, 의자며 탁자에 끊임없이 못질을 했다. 쿠르트는 페르텐 교수의 '근데, 자넨 누구지"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근데, 자넨 누구지?'하는 그 물음을 듣고 나 역시 한참 동안 멍한 상태가 되었다.


나에겐 피아노의 A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나 끊임없이 옷을 지을 옷감 혹은 사방에 수놓을 못이 있는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여직까지도 시원스레 대답하기 어려웠고 앞으로도 명확한 대답을 찾기 어려울 질문이겠지만, 최근 들어 그런 고민을 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고, 조금 더 자라서는 디자이너였으며, 최근에 와서는 글을 읽고 쓰는 일이 즐겁다. 기호는 변했고 활동의 영역 또한 한결같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나 하고 있는 일로도 나를 표현하기 부족하다면, 어떤 기준으로 스스로에 대해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눈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면
주변이 흐려진다


눈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면 주변이 흐려진다. 쿠르트의 그림은 가까이서 볼 때 보다, 몇 발자국 떨어져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당장에 커 보이는 문제들로 인해 간혹 중요한 것들을 놓치곤 한다. 대개 그런 문제들은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몇 발자국 멀리 떨어져 다시 보았을 때 제대로 관찰할 수 있다.


우리 앞에 당면해 있는 문제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코앞에 놓인 것들로 인해 진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렇게 우울하고 유쾌한 영화 너무 좋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다시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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